유럽 '그린딜', 전방위 비판에 사면초가
2040년 이산화탄소 90% 감축 목표 … 르몽드 "농부와 기업인, 각국 정부도 이의 제기"
유럽연합(EU)이 기후변화 파리협정을 준수하기 위해 마련한 입법패키지 '그린딜(Green Deal)'에 대한 반대가 유럽 곳곳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그린딜은 EU가 2050년 기후중립을 달성하고 지속가능한 산업환경을 구축하기 위한 청사진이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30일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유럽인들은 속속 추가되는 환경관련 규제에 지친 상황이다. 농부들은 거리로 나와 '브뤼셀이 내리꽂는 강압적 규제'라며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극우정치인들은 이런 상황을 자극하며 표심으로 연결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EU 집행위원회는 내달 6일(현지시각) '2040년까지 EU의 CO2 배출량을 1990년 대비 90% 감축'하는 그린딜 2단계 목표를 제안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2021년 그린딜 1단계로 '2030년까지 배출량을 55% 감축'하기로 약속한 EU 27개 회원국이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완전히 달성하기 위한 중간경로를 의미한다.
EU 집행위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위원장은 6월 6~9일로 예정된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이 새로운 이정표를 의제로 삼았다. 물론 집행위 제안은 구속력이 없다. 그린딜 신규내용이 확정되려면 6월 선거 이후 집행위가 입법제안서를 제출한 뒤 27개 회원국과 새로 구성된 유럽의회가 승인해야 한다. 유럽의회 환경위원회 위원장인 파스칼 캉팽은 "유럽인의 지지가 없다면 그린딜은 사실상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바뀐 정치적 환경
27개 EU 회원국은 그린딜 1단계 목표 달성 조치로 △2035년부터 신차에 내연기관엔진 사용 금지 △탄소시장 개혁 △EU 국경간 탄소세 도입 △재생에너지 목표 채택 △삼림파괴를 통해 생산된 제품의 수입금지 등 광범위한 결정을 내렸다. 이와 관련한 50개 이상의 EU 법안이 이미 채택됐으며, 10여개 법안이 준비중에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올해 유럽의회 선거에서 독일을 중심으로 민족주의·포퓰리즘 우파운동이 크게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럽의회 다수당인 보수성향 유럽국민당(EPP)은 그린딜 저지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 제2정당인 사회민주당(S&D)이 공식적으로 그린딜을 옹호하고 있지만 현실은 복잡하다. 그간 그린딜을 지지했던 중도성향 제3정당인 리뉴당의 입장이 불분명하다.
또 그린딜을 가장 열렬히 지지하는 녹색당의 경우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지지율이 급락하고 있다. 유럽의회 녹색당 공동대표인 필립 람베르츠는 "지난 201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기후대처 찬성 분위기가 거셌다. 그린딜 반대는 정치적인 약점이었다"며 "하지만 이제는 정치적으로 이익이 된다. 녹색당은 그린딜 사수에 목숨을 건 승부를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
제조업체들의 커지는 우려
자연재해 확산과 코로나19 팬데믹 발발, 값싼 러시아산 가스의 공급중단 등의 상황이 처음에는 기후의제 추진의 촉진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에너지가격 급등, 기준금리 상승, 인플레이션 상승 등으로 경기침체 그림자가 어른거리면서 기후의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현재 제철·시멘트 생산업부터 자동차 제조업, 건설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산업계가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제조업체들은 그린딜과 관련된 복잡한 행정적 절차에 질식할 것 같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또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 받는 미국·중국의 경쟁업체가 유럽 기업들을 대체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향후 10년간 녹색기술에 3690억달러를 지원하겠다는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발표는 많은 유럽인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유럽 고용주 단체인 비즈니스유럽은 2023년 11월 7일 보도자료를 통해 "유럽은 경쟁력을 잃고 있다"며 "미래에 대한 투자가 더이상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EU가 환경규제의 선두주자라고 뽐내지만 태양광패널 경쟁에서 중국에 패한 것처럼 전기차 배터리나 풍력터빈 경쟁에서도 패배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농부들의 분노
농업 부문은 조직적인 저항을 하고 있다. 에너지 위기와 우크라이나산 농산품에 대한 시장개방으로 약화된 농민들은 그린딜이 농업을 더욱 옥죄고 있다고 비난한다. 고속도로 봉쇄와 트랙터 집회 등이 네덜란드에 이어 프랑스와 독일 루마니아 폴란드에서 벌어지고 있다. 27개 회원국은 유럽 전역에서 '농민판 노란조끼운동'이 확산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탈리아와 스웨덴 네덜란드에서 그린딜에 반대하는 극우정당들이 선거에서 속속 성공하고 있다. 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유럽의회 최대 정당인 유럽국민당은 환경관련 입법프로젝트를 겨냥한 전쟁을 선포한 상황이다. 극우파뿐 아니라 남유럽과 동유럽의 일부 사회주의 성향 유럽의회 의원들, 북유럽 국가의 일부 자유주의 성향 의원들도 유럽국민당의 전쟁선포를 지지하는 상황이다. 그 결과 유럽의회에서는 자연복원에 관한 법률이 대부분 폐기됐고, 2030년까지 식물 성장촉진 제품의 사용을 절반으로 줄여야 한다는 법안이 부결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EU 집행위도 올해 6월까지 추진하려던 화학물질 규제(REACH) 개정안, 농업계가 반대하는 동물복지 및 지속가능한 식품시스템에 관한 법안 등 몇가지 법안을 포기했다. 지난해 11월엔 논란이 되고 있는 제초제 글리포세이트를 10년 연장하는 안을 승인했다. EU 회원국들의 반대는 없었다.
'추가 규제 중단' 요구 확산
회원국 정부들의 반대도 커지고 있다. 당초 그린딜을 반대하는 국가는 고탄소 경제구조를 가진 폴란드와 헝가리에 그쳤지만 이제는 아니다.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해 5월 '규제 확대 중단'을 촉구하고 나섰다. 마크롱 대통령은 EU에 "새로운 규제로 프랑스 국민에게 또 다른 부담을 주지 말라"고 촉구했다.
6월 말엔 키프로스 라트비아 스웨덴 그리스 오스트리아 핀란드 크로아티아 아일랜드 등 유럽 우파국가 정상들은 그린딜 규제를 '일시중지'하자는 'EPP 선언'에 서명했다. 이들 국가는 "러시아의 세계질서 공격 이후 새로운 경제적·사회적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부 국가들은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독일은 지난해 가을 건물에 대해 적용하는 새로운 에너지효율 표준을 포기했다. 스웨덴은 탄소배출에 부과하는 세금을 내리고 휘발유·경유의 바이오연료 비율 규제를 완화했다. 우크라이나전쟁이 발발한 후 많은 유럽국가들이 가스 및 기타 화석연료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27개 회원국이 그린딜 2단계를 만장일치로 지지할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어렵다. 이 목표가 채택될 경우 새로운 입법패키지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EU 한 외교관은 "이미 채택된 그린딜 1단계 법안만으로도 EU는 2040년까지 1990년 수준 대비 배출량을 81% 감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럽 싱크탱크 '스트래티직 퍼스펙티브' 국장 닐 마카로프는 "204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90% 줄인다는 것은 2037년까지 가스에서 전기를 거의 생산하지 않고 경제의 절반에만 전기를 공급한다는 의미"라며 "또한 2015년 대비 건물의 에너지 소비를 절반으로 줄인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와해될 위험' 지적도
프랑스 싱크탱크 '자크 들로르 연구소' 푹 빈 응웬은 "그린딜과 관련해 이미 성취한 것을 와해시킬 심각한 위험이 있다. 그린딜 1단계에서 의결된 대부분의 사안이 재검토 조항을 갖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며 "재검토된다면 그린딜 야망이 위축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르몽드는 "유럽 그린딜은 발효되기도 전에 공격을 받고 있다. 유럽 국가들이 2030년 배출량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고 전했다.
유럽 기후변화 과학자문위원회는 이달 18일 "현재 및 계획된 정책을 고려할 때 2030년까지 유럽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55% 줄인다는 목표에 훨씬 못 미치는 49% 감축에 그칠 것"이라고 분석했다.
르몽드는 "하지만 이 전망치도 회원국들이 기존에 합의한 그린딜 1단계를 정해진 기간 내 이행할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한 것이다. 현재 급변하는 정치환경에서 큰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