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전력망 시대가 왔다 '그리드 베이비 그리드'
반도체와 AI발 전기갈증은 물론 우리의 일상에서도 전기가 없는 단 한 시간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정전 걱정은 크지 않다.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가 그리드를 통해 안정적으로 흐른다는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발전기의 전압은 먼 거리까지 전기가 흐를 수 있도록 전류를 밀어준다. 그리드 중간에 변압기를 설치해 전압을 높여주면 전기를 더 멀리 보낼 수 있다.
원자력이나 가스발전소에서 나오는 전압은 18kv이다. 변압기를 사용하여 345kv나 765kv로 승압하여 초고압선으로 보내면 더 먼 곳으로 보낼 수 있다. 이러한 승압과정을 거쳐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수요지 인근으로 보내는 것을 송전이라고 한다. 이 전기는 22.9kv 이하로 낮추는 몇 단계의 강압과정을 거쳐 공장이나 건물, 주택으로 보내진다. 이 과정을 배전이라고 한다.
늘어나는 전력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발전소가 필요하다. 전기를 실어나를 그리드도 필요하다. 메타 구글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빅테크들은 귀해진 전력망 확보에 기업의 명운을 걸고 있다. 기존 그리드를 활용할 수 있다면 석탄발전소나 원전 재가동에 필요한 투자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한편 태양광이나 풍력과 같은 변동성 전원 비중이 높아지면서 그리드의 안정성은 더욱 취약해졌다.
공급망 병목으로 그리드 부족현상 발생
국제에너지기구(IEA)는 공급망 병목으로 인한 그리드 부족현상이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최근 발표했다. 케이블 조달에 2~3년이 걸리고 대형 변압기는 무려 4년 이상 소요된다고 한다. 장거리 송전에 필요한 초고압직류송전망(HVDC) 조달 대기시간은 5년이 넘는다.
케이블 비용은 2019년 이후 두 배 올랐다. 변압기 가격은 약 75% 증가했다. 대형 원전 1000여개가 넘은 1600GW 규모의 태양광과 풍력발전 프로젝트가 그리드에 연결되지 못한 채 가동을 못하고 있다. 그리드는 에너지안보에도 매우 중요하다. 그리드를 가진 나라는 전력패권도 거머쥘 수 있다. 지난 1월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및 에스토니아 등 발트해 3국은 러시아와 연결된 해저케이블을 끊고 핀란드·스웨덴 등을 통해 유럽대륙 전력망에 합류했다.
지난 겨울 북부유럽에서는 잔뜩 흐린 기상에 바람도 거의 불지 않는 둥켈플라우트현상이 자주 발생했다. 재생에너지 발전이 멈추자 특정시간대 전기요금은 전년보다 무려 10배 이상 치솟았다. 스웨덴과 노르웨이 일각에서는 독일의 탈원전과 탈석탄 탓을 하며 독일에 대한 전력공급 중단하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다.
트럼프정부의 관세인상에 대응해 캐나다 온타리오주는 전기요금에 25%를 할증하는 대응조치를 발표했다. 석유패권국가인 사우디는 대규모 태양광과 원전에서 생산된 전기를 중동 전역은 물론 아프리카 북부, 남부유럽까지 보내는 전력그리드 패권을 꿈꾸고 있다. 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 튀르키예는 범 흑해-지중해 해저케이블을 구상하고 있다.
그리드 신뢰성 높이는 데 국가역량 결집을
전세계가 ‘그리드 베이비 그리드’를 외치고 있다. 다행히 2월 27일 전력망확충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에너지정책의 최우선순위를 그리드에 두고 전력망을 전략적으로 확충해나가면서 그리드의 신뢰성을 높이는 데 국가적 역량을 결집해 나가야 한다. 전력기자재 수퍼사이클도 상당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글로벌 그리드시장을 향한 K-그리드의 전열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정책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