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의 젠(ZEN)과 잡스의 선(禪)

2025-03-21 13:00:03 게재

애플의 핵심 철학,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완전한 통합 … 선불교 영향

하나는 둘이 될 수 없으니(Can’t be two of one). 이달 7일 발매된 가수 제니의 첫 번째 정규앨범 9번 노래 제목은 젠(ZEN)이다. ‘젠’의 마지막 가사는 “하나는 둘이 될 수 없으니”라는 오묘한 문장이다. 하나는 둘이 될 수 없다, 하나는 둘이 될 수 없다…. 선문답의 화두처럼 알 듯 말 듯한 문장을 붙들고 필자는 며칠 끙끙 앓는다.

실리콘밸리 기저에 깔린 정신을 이해하기 위해 틈날 때마다 밖으로 나갔다. 2022년 1월, 일주일 동안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을 걸어서 순례했다.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난 도시 ‘팔로알토’에서 숙소를 하나 발견했다. 호텔의 이름은 ‘선(禪, zen)’이었다. 사진 김욱진

세속의 수행자답게 테크놀로지의 도움을 받기로 결심한다. 구글의 생성형 인공지능 모델 ‘제미나이’에게 묻는다. 데이터세트 크기를 고려해 영어로 질문을 던져 답변을 받고 다시 우리말 번역을 의뢰했다. 제미나이는 은유로 가득한 예술을 해석하는 것은 수용자의 주관적 영역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그럼에도 “하나는 둘이 될 수 없다”는 뜻의 몇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개성(Individuality), 자기통합(Self-Unity), 집중(Focus), 전념(Single-Mindedness), 존재의 본질(The nature of being). 제미나이가 서술한 답변의 키워드다. 어려운 단어를 연달아 접하고 나니 펀치를 맞은 것처럼 마음이 무겁다. 기술진보의 도구를 써서 지름길로 가보려 했지만 통하지 않는다. 정공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젠’, 실리콘밸리를 이해하는 관문

우선 ‘젠’이 무엇인지 사전적 의미부터 찾아본다. 롱맨 현대 영영사전은 젠을 “명상을 강조하는 일본에서 온 불교의 한 종파(a kind of Buddhism from Japan that emphasizes meditation)”라고 한 구절로 설명하고 있다. 젠을 들었을 때 명상을 떠올리는 것은 우리도 낯설지 않다.

하지만 서구인들이 젠을 일본과 연결해서 인식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식 발음 ‘젠’은 중국어로는 ‘찬(Chan)’이고 우리말로는 ‘선(禪)’이다. 젠은 한마디로 선불교다.

그렇다면 서구인들은, 특히 미국인들은 선불교를 어떻게 일본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20세기 중후반 선불교가 일본에서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미국 서부로 전파된 역사를 추적하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기술 혁신 중심지 ‘실리콘밸리’의 탄생과 확장 과정에서 기저에 깔린 정신을 이해할 수 있는 관문이 되기 때문이다.

선불교가 미국에 전파되는 데 있어 두 명의 일본인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둘의 성씨는 모두 스즈키다. 우선 스즈키 다이세츠는 선불교를 학문적으로 미국에 소개했다. 그의 저작 ‘선과 일본문화(Zen and Japanese Culture)’는 1959년 프린스턴대학 출판부를 통해 처음 미국에서 발간된다. 이 책에서 그는 선을 간략하게 정의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선은 인도 사상과 접촉한 후 탄생한 중국식 정신의 산물(Zen is one of the products of the Chinese mind after its contact with Indian thought)”이라고 말이다.

스즈키 다이세츠는 인류 문명이 위기에 처한 원인을 서구식 합리주의가 갖는 한계에서 찾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동아시아의 직관적 사고방식인 ‘선’을 사상적으로 미국에 안내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이에 반해 일본인 승려 스즈키 순류는 미국 서부 젊은이들이 ‘선’을 직접 수행할 수 있도록 인도자 역할을 자처했다. 1959년 55세의 나이로 미국 땅을 밟은 그는 일본 귀국을 몇 번 연기한 끝에 미국에 머물기로 결심한다. 1962년 미국 최초의 선 수행센터인 ‘샌프란시스코 선 센터(San Francisco Zen Center, SFZC)’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선 수행법을 지도한다.

그는 현지에 남기로 결정한 동기를 미국인들이 지닌 초심(初心)으로 설명했다. 스즈키 순류는 “미국인들이 선에 대한 선입견이 없고, 선에 대단히 개방적이며, 선이 자신들의 삶에 도움이 된다고 확실히 믿고 있으며,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선(禪)적인 삶을 살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스즈키 순류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대표적 인물이 바로 애플의 공동창업자 스티브 잡스다. 블룸버그뉴스 탐사보도 기자로 활동하는 케일럽 멜비가 2012년 1월 발간한 책 ‘스티브 잡스의 선(The Zen of Steve Jobs)’에는 잡스와 순류의 만남이 그래픽노블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1971년 당시 홈스테드 고등학교에 다니던 스티브 잡스는 샌프란시스코 선 센터를 운영하던 스즈키 순류를 찾아간다. 깊은 깨달음을 원한 고등학생 잡스는 대학에 진학해서도 스즈키 순류의 법문집 ‘선심초심’에 큰 감명을 받았다. 대학 시절 선 수행을 함께한 동급생 대니얼 콧키에게도 강력히 권할 정도였다. 대니얼 콧키는 잡스와 인도 순례를 떠난 친구이자 애플의 12호 정규직원이다. 콧키는 잡스가 죽고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잡스는 선에 심취한 사람입니다. 그의 모든 접근 방식은 순전한 미니멀리즘 미학과 강렬한 집중이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게 다 선에서 얻은 겁니다.”

애플을 창업하고도 스티브 잡스의 선 수행은 지속됐다. 1984년 갓 출시된 맥킨토시를 안고 포즈를 취한 그는 양쪽 무릎이 완전히 바닥에 닿는 결가부좌 자세를 하고 있다. 이 장면을 포착한 사진작가 노먼 시프는 CNN과 인터뷰하며 당시를 회상했다. “사전에 계획한 게 아니었어요. 구루(guru)처럼 명상하는 걸 보여주겠다는 의도도 없었어요. 그에게는 바닥에 앉는 게 자연스러웠고 그저 무릎 위에 컴퓨터를 올려놓았죠. 단번의 촬영이었어요.”

평생에 걸친 잡스의 스승 선승 오토가와

잡스가 평소에 얼마나 지독할 정도로 좌선(坐禪)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평생에 걸친 잡스의 스승은 스즈키 순류의 제자인 오토가와 고분 치노였다. 그는 일본 출신 선불교 승려로 교토 대학에서 수학하고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왔다. 1991년 잡스 결혼식의 주례를 맡을 정도로 수십 년간 그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물론 선불교 정신은 잡스의 개인적 성격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잡스 전기를 작업한 월터 아이작슨은 “애플 제품에는 잡스의 성격이 반영되었다(His personality was reflected in the products he created)”고 단언한다. 20세기의 매킨토시부터 21세기의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에 이르기까지 애플의 핵심 철학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완전한 통합(integration)이다.

잡스는 2002년 타임과 인터뷰하며 ‘통합에서 비롯되는 완전함’을 추구하는 애플의 가치관을 설파한다. “애플은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운영체제 등 모든 걸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용자 경험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선불교식 통합적 접근법은 때때로 애플의 단기 비즈니스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설프게 디자인한 하드웨어, 사용하기 불편한 소프트웨어, 이해할 수 없는 에러 메시지, 조잡한 인터페이스로 가득한 테크놀로지 세계에서 애플 기기를 단연 돋보이게 만드는 전략이었다. 아이작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떤 이에게 애플 제품을 사용하는 것은 “교토 선불교 사원의 정원을 걷는 것만큼 숭고한(sublime as walking in one of the Zen gardens of Kyoto)” 일이었다.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도 선 수련

3년 간의 미국 실리콘밸리 근무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지도 1년이 넘었다. 필자가 아직도 붙들고 있는 화두는 외형상 동아시아인지만 실생활에서 동양적 가치를 제대로 수련하지 못한 채 성장했다는 자각이다. 우리가 서구식 합리성을 좇는 사이, 서구의 창업가들이 선의 정신을 일상에서 기업과 제품으로 구현했다.

애플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의 자서전 ‘슈독’을 펼치면서 또 한번 놀라게 된다. 그 역시 스즈키 순류의 선심초심을 인용하며 여정을 시작하고 있다. “초심자의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지만 숙련자의 마음에는 가능성이 아주 적다(In the beginner’s mind there are many possibilities, but in the expert’s mind there are few)”는 문장이 그것이다.

미국 서부의 창업가들이 실용적으로 풀어낸 선(禪)을 한국의 대중예술가가 이어받았다. ‘하나는 둘이 될 수 없다’며 제니가 젠에서 던진 화두를 직업인으로서 다시 이어받는다.

세속에서 밥벌이를 하면서도 수련을 멈추지 않는 것, 수련을 하면서도 세속의 밥벌이를 소홀히 하지 않는 것, 궁극적으로 밥벌이 자체가 수행이 되는 것. 이게 초심자로서 필자가 삶에서 적용해본 ‘하나는 둘이 될 수 없으니’의 화두 풀이다.

김욱진 코트라 경제협력실 차장 ‘실리콘밸리 마음산책’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