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그래, 그렇게 떠나시라
4일 헌법재판소의 탄핵선고를 앞두고 대부분의 정치부 기자들은 인용과 기각의 경우를 나눠 기사를 준비했을 것이다. 온 국민의 관심이 쏠리는 사건에 대해선 경우의 수에 대비한 기사를 써두는 게 기자의 일이다.
대통령실 출입기자로서 나 역시 기각과 인용 시 각각의 정치적 여파와 이후 상황을 가정한 기사를 썼다. 기각 시에는 가까스로 복귀한 대통령의 ‘살 길’이 과연 있을지 고민했고, 인용 시에는 스스로 파국을 자초한 대통령에 대해 썼다.
두 기사를 쓰는 내내 궁금했던 것은 하나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질까?’ 역대급 위기를 자초한 그는 국민에게 사과할까. 이번만큼은 정말, 진심어린 사과를 할까.
대통령의 사과가 왜 그리 고프냐고 묻는다면 12.3비상계엄 이후 나라와 국민이 겪은 일을 돌아보라 말하고 싶다. 황당무계한 계엄령 탓에 환율은 폭등하고, 내수는 줄고, 국격은 떨어졌다. 찬탄과 반탄의 극단으로 국민은 갈라졌고, 초유의 법원 침탈, 현직 대통령의 구속, 민주주의의 근간을 부정하는 부정선거론까지. 사회 불신 위에 또 다른 불신이 덧씌워지고 음모론은 폭주했다.
헌재 결정이 깔끔하게 났다고 해서 이 모든 상처를 잊을 순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새출발의 시작은 헌재 판단이 아니라 윤 전 대통령의 진심어린 사과여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의 연이은 메시지는 참 기가 막힌다. 사과도 승복도 다 생략하고 지지층을 향한 감사인사만 했다.
4일 파면 직후 그는 “그동안 대한민국을 위해 일할 수 있어서 큰 영광이었다”고 뜬금없이 운을 떼더니 “많이 부족한 저를 지지해주시고 응원해주신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했다. 탄핵에 반대해 왔던 나경원 의원을 관저로 불러선 또 “고맙다”고 했고, 여당 지도부에겐 엉뚱하게 “대선승리”를 기원했다.
6일 지지자 단체인 국민변호인단에겐 “나라의 엄중한 위기 상황을 깨닫고 자유수호를 위해 싸운 여러분의 여정은 대한민국의 위대한 역사로 기록될 것”이라며 또 한번 감사인사를 전했다.
이제 모든 기대를 접는다. 윤 전 대통령은 자신이 초래한 모든 혼란을 그저 외면하기로 한 듯하다. 아니, 어쩌면 그 혼란이 무엇인지 자각조차 없는 것 같다. 그의 메시지에선 책임회피와 현실부정, 그리고 여전한 자기확신 속에서 지지층말고는 아무 것도 보지 않는 편협함만 읽힐 뿐이다.
그래, 그렇게 떠나시라. 우리 국민들은 윤 전 대통령이 준 유일한 교훈 위에 서 있다. 민주주의가 아무리 강고해 보여도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 어떤 일이든 실제로 벌어질 수 있다는 냉철한 깨달음. 그 교훈을 새기며 더 단단한 민주주의를 향한 길을 걸어갈 것이다.
김형선 정치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