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전쟁 엇갈린 명암 … 초조한 미국, 느긋한 러시아

2022-06-17 11:33:11 게재

장기전으로 가면서 피로감 누적 … 서방진영 고민커져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본격화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당초 예상과는 달리 100일을 훌쩍 넘기면서 장기전이 됐다. 전쟁이 길어지는 것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전쟁 초반에는 군사력에서 우크라이나를 압도하는 러시아가 속전속결로 목적을 달성할 것으로 점쳤지만 결과는 달랐다. 우크라이나의 엄청난 저항과 국제사회의 지원 등이 러시아의 초반 예봉을 꺾었다. 이때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사회는 이번 기회에 러시아를 굴복시키기로 맘을 바꿨다. 강력한 제재와 봉쇄를 무기로 해 러시아 고사작전에 돌입한 것이다.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막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이렇게 되자 전쟁의 성격마저 완전히 바뀌었다. 미국(서방)의 대리전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히 등장했다.

국제문제 전문매체인 포린폴리시는 지난 5월 2일 "서양 vs 나머지 국가들"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우크라이나 문제가 단순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대결이 아니라 점차 지구적 범위로 확대되는 21세기 신냉전이 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6월 1일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지역에서 포격 공격으로 심하게 손상된 건물 밖에 사람들이 구호품을 받아가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장기전의 엇갈린 표정 = 엄청난 소모전을 동반한 전쟁의 장기화는 직접적인 전쟁 수행 국가뿐만 아니라 주변 관련국들에게도 피로감을 안기고 있다. 우크라이나 최근 전황은 크게 변동이 없다. 대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를 야금야금 장악하고 있는 양상이다. 마리우폴이 그렇고, 최근 돈바스 지역 사정이 그렇다. 너무 서두르거나 무리하는 기색도 없다.

비록 대의명분에서는 밀렸지만 실속은 확실히 챙기는 셈이다. 러시아는 전쟁 초기 북대서양 조약기구(나토)의 동진과 우크라이나의 잦은 도발이 군사행동을 불렀다고 주장했지만 국제여론은 냉담했다.

오히려 우크라이나의 호소에 국제사회는 지지를 보냈고, 미국과 유럽 등 나토를 중심으로 한 서방 세계는 한층 강력한 동맹으로 변모했다. 유엔총회와 나토정상회의 등을 통해 러시아에 대한 규탄과 제재를 결의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이 과정에서 출혈도 감수했다. 러시아로부터 원유와 천연가스, 곡물 등을 수입하는 유럽국가들의 금수조치를 취하면서까지 제재 대열에 동참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고 있다.

국제사회의 규탄을 받고 제재의 대상이 된 러시아는 여유롭게 버티는데 제재를 단행했던 유럽과 미국이 되레 타격을 입고 있다.

이는 수치로도 확인됐다. 핀란드 에너지·청정대기연구센터(CREA)는 13일 보고서를 통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 100일 동안 화석연료 수출로 930억유로(125조원)를 벌었다고 밝혔다. 서방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전쟁 이후 날마다 1조원 이상을 벌어들인 셈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세부 내용이다.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EU가 61%, 570억 유로(약 77조원)를 수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러시아 대한 제재조치를 합의한 EU가 여전히 최대 시장임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더구나 에너지 소비가 많아지는 가을 겨울로 접어들면 EU 국가들 사이에서 상당한 동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여기에 중국과 인도, 아랍에미리트(UAE)와 프랑스 등 일부 EU국가들은 러시아산 구매를 늘리고 있다.

CREA는 "EU가 러시아에 대한 제재 강화를 검토하고 있는 가운데 프랑스는 세계 최대 LNG 구매국이 되기 위해 수입을 늘렸다"면서 "(특히) 대부분 장기 계약이 아닌 현물 구매이고, 이것은 프랑스가 우크라이나 전쟁 후에도 고의적으로 러시아 에너지를 구입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출구전략은 없나 = 영원한 전쟁은 없다. 어떤 형태로든 마무리를 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시점과 명분이다. 전쟁이 마무리될 수 있는 시나리오는 여러 가지다. 우선 우크라이나가 주장하는 대로 러시아를 침공 이전 상태로 완전히 몰아내는 경우다. 하지만 현재 전황이나 군사력 등을 종합적으로 볼 때 쉽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반대로 우크라이나가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의지와 능력을 상실하는 경우도 상정해 볼 수 있다.

현재까지는 미국과 서방의 지원 그리고 젤렌스키 대통령을 비롯한 우크라이나 국민들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지만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특히 미국과 서방의 지원이 원활하지 못하거나 줄게 되면 전세는 급격히 기울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의식한 듯 젤렌스키 대통령은 13일 동영상 성명에서 "(8년 전 러시아에 합병된 크림반도 도시인) 얄타, 수다크, 잔코이, 예우파토리야에 우크라이나 국기가 휘날릴 것"이라며 "당연히 우리가 크림반도를 해방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경우도 가정해 볼 수 있다.

러시아가 국제사회의 제재와 고사 작전에 백기를 드는 경우다. 한때 러시아 경제가 디폴트 상태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여러 번 나왔지만 러시아는 끄떡하지 않았다.

다음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 진영과 러시아가 직접적으로 군사적 충돌을 벌이게 되는 경우다. 이 경우는 그야말로 최악의 경우다. 3차 세계대전이나 핵전쟁까지도 가정해야 하므로 어느 쪽도 결단이 쉽지 않다.

그렇다면 전쟁을 조속히 끝내지 않고 교착상태에서 시간을 끌어가는 경우도 가정해 볼 수 있다. 일단 러시아는 전혀 급하지 않은 태도를 보인다. 여기에 미국 역시 일정한 선을 지키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지원하지만 그렇다고 게임체인저가 될 만한 무기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주저한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공세에 너무 쉽게 무너지지 않고 어느 정도 버틸 정도만 지원하는 분위기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노력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미국 국익은 철저히 챙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한 최대 수혜자가 미국이 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유명무실해져 가던 나토를 다시 굳건히 세우고, 분열조짐을 보이던 유럽연합까지 모아 러시아와 일전을 불사할 만큼 만들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향후 중국과의 사활을 건 패권경쟁의 중요한 자산이기도 하다. 조기 승부가 날 것으로 봤던 전쟁이 100일을 훌쩍 넘기고도 별다른 전황 변화가 없는 소모전을 이어가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장기전의 함정 = 장기전은 두 가지 결정적 약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계절적 요인이다. 날씨가 추워지고 에너지 소모가 많아지면 유럽연합 내부의 갈등과 분열, 이탈이 발생할 개연성이 크다.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가 큰 유럽 국가들부터 동요할 수밖에 없다.

미국도 마냥 꽃놀이패는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미국 내부가 불안해진다. 물가폭등과 인플레이션이 겹치는 스태그플레이션 압박은 바이든 행정부의 지지기반을 흔들고 있다. 특히 휘발유값의 인상은 미국민들의 생활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 물가를 잡지 못한 바이든의 지지도가 급락하면서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할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미국의 중간선거는 대통령에 대한 신임투표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바이든 대통령은 결국 해법을 찾기 위해 자신의 말을 번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음 달 중순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키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비난을 감수하고서도 사우디를 방문하는 것은 결국 그만큼 다급하다는 방증이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는 "중국이나 러시아는 원래부터 내핍을 견디는 것에 익숙해져 있지만 미국이나 유럽은 불편하면 견디기가 힘들다"면서 시간을 끌수록 미국과 서방이 더욱 힘들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평화협상 나서야 =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은 단지 군사전쟁의 범주에 머물지 않고 있다. 정치전쟁, 경제전쟁의 성격도 지닌다.

당연히 해법도 간단치가 않다. 전쟁 초반 평화협상이 무산되고, 속절없이 장기전으로 치닫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해법을 제시한 석학들도 있다.

존 미어샤이머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지난 4월 14일 "미국의 최대 적은 러시아가 아닌 중국"이라고 단언하면서 우크라 중립선언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특히 미어샤이머 교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미국과 서방이 러시아를 자극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이번 전쟁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 접경지에 서방의 방어벽(Bulwark)으로 삼은 문제"라면서 2008년 4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담이 발단이었다고 봤다. 당시 나토는 우크라이나와 조지아가 당장은 아니지만 장차 나토 회원이 될 수 있다고 발표했는데 이에 대해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은 즉각 레드라인을 넘었다고 경고한 바 있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우크라이나가 중립국이 되는 것이 해결책"이라면서 "우크라이나가 나토 회원이 되고 러시아 국경의 서부 방어벽이 되는 것에 대한 어떠한 이익도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부 장관도 5월 23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 연차총회에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에 참패를 안기려는 시도는 유럽의 장기적 안정에 재앙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우크라이나가 조속히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특히 그는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격전 중인 우크라이나가 이번 전쟁 이전에 러시아에 빼앗겼던 영토마저 회복하겠다는 태도를 버려야 하며,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도 전쟁을 더 길게 끌고 가기보단 협상을 지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극복할 수 없는 격변과 긴장을 촉발하지 않으려면 두 달 안에 평화협상을 시작해야 한다"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경계선은 개전 전 상태(status quo ante)로 돌아가는 것이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키신저에 앞서 미국의 원로 국제정치학자인 그래험 앨리슨 박사는 5월 20일 독일 슈피겔 인터뷰에서 "푸틴이 전쟁을 확대시키지 않고 끝내게만 한다면 성공"이라고 말했다.

앨리슨 박사는 "불편하고 참을 수 없어 보이지만 푸틴이 벼락 맞고 죽지 않는 한 우리는 악마와 함께 전쟁을 끝내야 한다"며 "혐오스러운 지도자나 극단적인 대량살인자들과 협상하는 것이 국제관계이다"라고 강조했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
정재철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