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양 할머니 인권상 수상은 왜 무산됐나

2022-12-14 11:49:48 게재
일제강점기 조선여자근로정신대로 강제동원됐던 피해자로 30년간 '재판투쟁'을 벌여 인권회복운동의 상징이 된 양금덕 할머니에 대한 '2022 대한민국 인권상'(국민훈장 모란장) 수상이 무산됐다. 외교부가 "관련부처 간 사전협의가 필요하다"며 제동을 걸면서 국무회의에 안건이 상정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선정한 수상자를 외교부가 '관련부처 협의 필요'를 내세워 사실상 반대하고 나선 배경을 추측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물밑 협의 중인 '해법' 차질 빚어 관계개선 늦어질까 조바심

윤석열정부는 그동안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속도를 내왔다. 북한 핵 대비를 이유로 한미일 군사협력 강화에 힘을 쏟고 있다. 한일관계 개선에 걸림돌이 될 요소는 과감히 배제하고 돌진하겠다는 태도가 일본 눈치살피기로 나타나 양 할머니 인권상 수상까지 가로막은 것이다. 외교부는 14일 예정된 한일관계 민관토론회도 갑작스레 취소시켰다.

강제동원 문제로 30년 동안 싸워온 피해자에게 대통령이 인권상을 수여하면 일본이 불편해할지 모른다. 물밑 협의 중인 강제동원문제 해법 마련에 차질이 빚어질지 모른다는 계산이 깔려 있을 터다. 피해자들의 고통이나 민족의 자존심 따위는 뒷전에 밀치고 관계개선을 서두르는 조급한 태도가 지난 9월 미국 뉴욕에서 윤 대통령이 기시다 일본총리 숙소로 찾아가 태극기도 없는 상태로 굴욕적인 정상회담을 하게 만든 것이다.

이렇듯 저자세로 접근하니 주도권도 뺏기고 일본의 콧대를 높여줘 '합리적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관계악화 책임을 전 정부 탓으로 돌리다 보니 일본은 애초 한국 쪽 잘못이니 스스로 해법을 만들어 가져오라는 오만하고 배부른 자세를 보여 왔다.

일본은 문재인정부 때 반도체 핵심소재·장비 수출을 규제한 '화이트리스트'로 타격을 주며 굴복을 획책하다가 실패로 돌아가 스스로 경제적 손실을 자초한 것이 공공연한 사실 아닌가.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반성과 진솔한 사과 없이, 빚진 자가 오히려 큰소리치는 후안무치한 태도가 한일관계를 더욱 멀어지게 한 것 아닌가.

양금덕 할머니(93)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일도 배우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 일본인 교장의 감언이설에 속아 일본 나고야 미쓰비시중공업 항공기제작소에서 17개월간 강제노역을 하고도 임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그는 1992년 일본정부를 상대로 첫 소송을 시작한 이래 일본정부와 강제동원기업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인권회복 투쟁을 계속해왔다. 일본에서 진행한 소송에서는 패소했지만 2018년 11월 한국 대법원으로부터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그러나 일본 쪽이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모든 배상은 끝났다'며 판결이행을 거부하자, 다시 일본기업 자산매각을 위한 소송을 진행 중이다.

외교부는 강제동원문제 해법으로 이른바 '대위변제'와 '병존적 채무인수' 방안 등을 일본과 협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대위변제는 한국정부가 일본 전범기업들을 대신해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우선 지급하고 추후 일본 쪽에 청구하겠다는 것. 병존적 채무인수는 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한일 양국 기업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피해자들에게 지급한다는 방안이다. 모두 일본 쪽의 사과 부분이 빠진 채 돈으로 해결해 보겠다는 편법이다. '일본의 사죄가 전제돼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피해자들이 과연 이런 편법을 수용할지 의문이다.

민감한 한일관계 당당한 자세로 과거사문제와 미래발전 병행해야

민감한 한일관계는 과거사문제와 미래지향 문제를 병행하면서 당당하게 건설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가해자인 일본이 최소한의 성의조차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정부의 무리하고 성급한 접근은 피해자들의 상처만 깊게 할 우려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캄보디아 프놈펜 아세안정상회의에서 한국판 인도·태평양정책을 공표하고 한미일 정상회담서 북핵과 중국을 겨냥한 동맹강화를 다짐했다. 미국과 손잡고 아시아에서 중국견제 대표선수로 나서겠다는 일본과 협력을 강화해 한미일 동맹으로 한반도 안보를 확고히 하겠다는 속내일 터다. 이런 맥락에서 문제가 많은 일본 자위대의 '반격능력 보유' 및 획기적 국방력 강화 추진에도 일체 비판적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한반도평화에 대한 근본적 인식이 결여된 채 남북대결을 상정한 뒤틀린 외교안보정책으로 과연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지 걱정이 앞선다. 첫 단추를 잘못 꿰니 비상식적인 일들이 다반사로 버젓이 행해진다.
이원섭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