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 집 은신 밀수범 “범인도피교사 아냐”
1·2심 “방어권 남용 판단” 유죄
대법 “통상적 도피 유형” 무죄
마약 밀수 혐의로 수사를 받던 도중 지인에게 부탁해 제공받은 은신처와 차명 휴대폰을 통해 도피했더라도 범인도피교사죄를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1· 2심은 피고인의 행위가 통상적 도피 행위의 범위를 벗어나 적절한 방어권 행사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유죄)했으나 대법원은 통상적 도피 행위에 해당해 적절한 방어권 행사(무죄)로 봐야 한다고 봤다.
대법원 3부(주심 엄상필 대법관)는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향정)과 범인도피교사 혐의로 기소된 A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22일 밝혔다.
대법원은 “원심 판결에 향정 부분은 법리 오해가 없으나 범인도피교사에 관해선 법리 오해가 있다”며 “원심이 마약(향정)과 범인도피교사를 모두 유죄로 인정해 하나의 형을 선고했으므로 결국 원심판결은 전부 파기돼야 한다”고 판시했다.
A씨는 공범들과 두 차례에 걸쳐 태국에서 메트암페타민(필로폰) 1.5kg을 밀수입했다는 범죄사실(마약 밀수 혐의)로 자신의 주거지에 대해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았다. 이에 A씨는 친하게 지내왔던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어디 머물 곳이 있느냐. 사용할 수 있는 휴대전화 1대만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다.
A씨는 지인의 집에 함께 머물며 도피 생활을 했다. A씨의 지인은 자신의 주거지로 찾아온 검찰 수사관에게 “나는 번호도 모른다. 연락하려면 다른 지인과 연락을 해야 한다”며 적극적으로 도피를 도왔다.
기본적으로 범죄 혐의를 받는 피의자는 ‘스스로 죄를 인정할 필요가 없다’는 자기부죄의 원칙에 따라 거짓말을 하거나 도망가더라도 처벌하지 않는다. 그러나 A씨처럼 타인을 동원해서 도피하는 등 스스로 도피하는 수준을 넘어 방어권을 남용하면, 타인에게 범인도피를 교사한 죄로 처벌할 수 있다.
이번 재판에서는 피고인이 도망가기 위해 타인을 동원한 행위가 방어권 남용으로 볼만큼 지나친 수준인지가 쟁점이 됐다.
1심과 2심은 마약 밀수 혐의와 함께 범인도피교사죄도 모두 유죄로 보고 징역 8년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일반적인 도피행위의 범주를 벗어나 형사사법에 중대한 장해를 초래하거나 형사 피의자로서 갖는 방어권을 남용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2심 재판부는 “자신의 범행이 발각된 이후 은폐하려 했고, 도피해 국가의 사법기능을 훼손하려 시도했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A씨의 행위가 “형사사법에 중대한 장애를 초래한다고 보기 어려운 통상적인 도피의 한 유형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며 “형사피의자로서의 방어권 남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봤다. 대법원은 “지인은 피고인과 10년 이상의 친분관계 때문에 피고인의 부탁에 응해 도와준 것으로 보이고, 도피를 위한 인적·물적 시설을 미리 구비하거나 조직적인 범죄단체 등을 구성해 역할을 분담한 것은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A씨를 자기 집에 숨겨주고 수사관들에게 ‘나는 번호도 모른다’고 거짓말을 한 지인은 별도로 기소돼 실형을 선고받고 형이 확정됐다.
김선일 기자 sikim@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