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갈등으로 쪼개지는 해저통신케이블
개별망 구축에 비용은 오르고 사업은 지연 … 닛케이 “하나의 세계, 두개의 시스템 현실화”
지구를 30바퀴 이상 감을 수 있을 만큼 긴 140만㎞의 전세계 해저케이블 네트워크가 둘로 쪼개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지정학적 갈등으로 각자 개별적인 통신망을 구축하면서다. 해저케이블은 글로벌 통신의 중추로, 전세계 데이터의 95% 이상을 전송한다. 닛케이아시아는 28일 “비용은 상승하고 사업은 지연되는 부작용이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닛케이아시아에 따르면 중국 해저케이블 제조업체 ‘우한 파이버홈 인터내셔널 테크놀로지스’는 2020년 미국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더 이상 미국기술을 이용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중국이 해저케이블 기술자립에 성공하면서 파이버홈과 같은 중국기업에 주문이 몰리고 있다.
이 회사 대표 우(Wu)는 닛케이아시아에 “우리는 미국의 블랙리스트를 신경쓰지 않는다”며 “미국과의 긴장은 우리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 해저통신케이블의 경우 중국은 모든 부품을 제조할 수 있다. 외국기술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지난 수십년 동안 해저케이블 시장을 지배했다. 하지만 해저케이블은 실시간으로 기술이 발전하는 반도체와 달리 이미 성숙한 시장이다. 중국이 미국을 빠르게 따라잡았다.
통신케이블 산업의 성공 여부는 국가 대 국가의 외교관계에 좌우된다. 누가 시장에 접근할 수 있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가 더 중요하다. 파이버홈 우 대표는 “미국의 해저네트워크는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라며 “해저케이블 산업은 멤버십클럽과 같아서 다른 국가와 연결하려면 해당국 정부의 동의가 필요하다. 이는 외교적 경쟁”이라고 말했다.
중국, 해저케이블 기술 빠르게 따라잡아
중국은 1993년 처음으로 국제 해저케이블을 구축했다. 하지만 주로 서구 주도 케이블 컨소시엄에 투자하는 데 머물렀다. 201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해저케이블의 주요 건설·공급업체로 부상했다.
그동안 주요 케이블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는 자금과 경험, 기술, 정부인맥을 갖춘 글로벌 기업은 소수에 불과했다. 미국 서브콤, 유럽 알카텔 서브마린 네트웍스, 일본 NEC 등이었다.
독일 싱크탱크 ‘메르카토르 중국연구소’ 수석애널리스트 안토니아 흐마이디는 “해저케이블은 숙성된 기술”이라며 “매년 변화하고 훨씬 더 발전하고 있는 첨단 반도체와는 다르다. 해저케이블 시장에서 중국 기업들은 사업을 통합하는 것만으로 큰 기업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 리서치회사 ‘텔레지오그래피’에 따르면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해저케이블 투자의 글로벌 중심지다. 올해부터 2026년까지 전세계 어느 곳보다 많은 투자지출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과 홍콩을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여러 동남아시아 국가와 연결하는 최소 3개의 프로젝트가 중국 주도로 건설중이다. 중국 통신분야 싱크탱크인 ‘중국정보통신기술아카데미(CAICT)’에 따르면 2023~2028년 설치됐거나 설치될 총 77만㎞의 해저케이블 중 45%를 중국기업들이 담당하고 있다.
중국 해저케이블 산업의 초기 리더는 통신장비 대기업 화웨이다. 화웨이는 2000년대 후반부터 자회사 ‘화웨이마린네트웍스’를 통해 가성비를 무기로 시장을 개척했다. 그러다 2019년 미국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그해 말 화웨이는 화웨이마린네트웍스의 지분을 전력·광섬유케이블 제조업체인 헝통그룹에 매각해야 했다. 헝통 그룹은 이를 ‘HMN테크놀로지스’로 개명했다.
그동안 화웨이와 HMN테크는 총 40개 이상의 국제 프로젝트에 참여해 9만4000㎞의 케이블을 설치했다. HMN테크는 홍콩과 동남아시아 국가를 연결하는 여러 주요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들은 향후 1~2년에 걸쳐 개통될 예정이다.
지상파광케이블 제조업체였던 파이버홈은 화웨이의 뒤를 이어 2015년 말부터 해양장비사업부를 설립해 점차 중국 내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화웨이마린네트워크가 미국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후 투자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파이버홈 역시 2020년 미국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파이버홈은 미국기술에 대한 접근이 차단된 후 핵심부품 제작부터 자체 케이블 포설선 확보에 이르기까지 기술자립 접근방식을 취했다. 파이버홈은 중국 최고 반도체제조업체인 중신궈지(SMIC)와 제휴해 해저케이블 부품을 제작하고 있다.
중국은 또 광섬유케이블의 주요 공급국가다. 양쯔 광섬유케이블, 헝통그룹, 파이버홈, 장쑤중톈기술 등 4개 회사가 전세계 시장의 35%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해저케이블, 지정학 갈등 소재로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는 미국과 전세계를 연결하는 해저케이블이 중국에 뚫리는 것을 막기 위해 2020년 ‘클린 네트워크’ 이니셔티브를 출범시켰다. 바이든정부도 미국기업들에게 데이터센터 허브인 홍콩에 새로운 케이블을 연결하거나 새로운 케이블이 남중국해를 통과하는 것을 막았다. 미국은 또 중국이 투자한 해저케이블이 괌을 포함한 미국영토와 연결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중국은 남중국해 주변에 미국기업들이 관여하는 케이블의 설치 허가를 지연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닛케이아시아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최소 6건, 5만㎞ 이상의 해저케이블 프로젝트들이 지연, 중단 또는 재설계 과정을 밟고 있다.
이 가운데 하나는 홍콩에서 괌을 거쳐 캘리포니아를 연결하는 ‘홍콩-아메리카 케이블 시스템(HKA)’이다. 이 프로젝트 참여기업은 메타, 차이나텔레콤, 타타커뮤니케이션즈, 텔스트라 등이다. 2018년 착공해 2020년 완공될 예정이었지만 미중 갈등으로 현재 답보 상태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한 업계 전문가는 닛케이에 “해저케이블이 이렇게 정치적으로 변할 줄은 몰랐다”며 “전체 케이블의 85%가 이미 바다 밑에 설치됐는데, 마지막 몇구간을 마무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차이나모바일과 메타, 아마존이 협력하는 ‘베이투베이 익스프레스 케이블 시스템(BtoBE)’도 난관에 부딛혔다. 당초 홍콩과 동남아시아, 캘리포니아를 연결하는 것이었지만 홍콩을 배제하면서 축소됐다. 현재는 필리핀과 미국을 연결하고 있다.
텔레지오그래피에 따르면 해저케이블에 대한 글로벌 투자는 2025년 40억달러를 넘어 사상최고치를 기록할 전망이다. 미중 갈등으로 설치비용이 상승했기 때문이다. 해저케이블 컨설턴트인 줄리안 롤은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는 해저케이블 1㎞당 3만달러를 책정했다. 하지만 이제 최소 4만달러, 최대 6만달러로 상승했다”고 말했다.
해저케이블의 정치화는 아시아 데이터센터 허브에도 영향을 미쳤다. 100개 이상의 데이터센터가 있는 금융중심지 홍콩은 한때 아시아행 해저케이블의 주요 기착지였다. 하지만 미국의 규제로 상황이 바뀌었다. 현재 건설중인 해저케이블 가운데 중국기업이 건설하거나 투자한 5개의 해저케이블만 홍콩을 거친다. 반면 괌과 필리핀은 데이터센터 수가 훨씬 적은데도 최근 수년 동안 해저케이블 연결이 급증했다.
데이터센터 허브 홍콩의 위상 축소
텔레지오그래피 분석가 레인 버뎃은 “미국으로 향하는 태평양 횡단 해저케이블은 이제 홍콩과 연결될 수 없다”며 “그렇다고 미국과 중국 간에 데이터가 오갈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통신트래픽은 제3자 링크를 따라 라우팅돼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역간 허브였던 홍콩은 이제 지역 내 허브로 축소되고 있다”고 말했다.
동아시아와 북미를 연결하는 지리적 이점을 누린 대만도 중국과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신규 연결이 감소하고 있다. 반면 싱가포르는 아시아 최대 데이터센터 기지 중 하나라는 장점과 위치 덕분에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연결지 중 하나다.
향후 해저케이블 신규 건설과 기존 케이블 업그레이드 수요가 급증할 전망이다. 일본 NEC의 해저 네트워크 사업부 상무이사 쿠와하라 아츠시는 “데이터 전송과 인공지능(AI) 컴퓨팅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선진국뿐 아니라 아시아와 인도, 아프리카 등을 연결하는 해저케이블에 대한 수요가 더욱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미중 갈등으로 양측은 각자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 더 많은 해저케이블이 필요하게 됐다. 메르카토르 중국연구소의 흐마이디는 “미국이 주도하는 케이블, 중국이 주도하는 케이블이 병존하는 ‘하나의 세계, 두개의 시스템’이 현실화됐다”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