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혈병 사망’ 삼성전자 엔지니어 산재 인정
대법, 근로복지공단 상고 기각 … 8년 만에 유족 승소
유족 “산재 인정돼 기쁘다 … 산업재해 제도 개선돼야”
삼성전자 영상사업부에서 14년 동안 일하다 숨진 엔지니어의 사망 원인으로 드러난 백혈병을 업무상 재해(산업재해)로 인정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고인이 사망한지 9년, 유족이 산재 신청한 지 8년 만이다.
16일 노동단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은 최근 삼성전자 엔지니어 고 장 모씨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심리불속행 기각해 확정했다.
심리불속행 기각은 원심에 문제가 없다고 보고 본안 심리 없이 판결을 확정하는 절차다.
장씨는 2001~2015년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영상사업부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근무하다 2015년 2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을 진단받았고, 한 달 뒤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씨는 TV소프트웨어 개발·불량검사·고온테스트 업무 등을 하면서 극저주파 전자기장과 1급 발암물질 포름알데히드에 오랜 기간 노출됐다. 일주일에 69시간 근무하는 등 장시간 일하기도 했다.
유족은 장씨가 사망한 다음 해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보상을 신청했다.
하지만 공단은 2018년 극저주파 전자기장은 백혈병과의 관련성이 명확하지 않고 노출 수준이 낮은 점 등을 들어 유족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단은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관련 논문들을 검토한 보고서에 근거해 극저주파 전자기장의 유해성을 부인해왔다. 포름알데히드 노출 수준도 사업주측 진술과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일회성 측정 결과에 근거해 판단했다.
1심 법원은 공단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유족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공단이 제시한 보고서가 관련 논문들을 왜곡해 인용했다고 봤다. 또 장씨가 상당한 양의 극저주파 전자기장에 장기간 노출된 점, 극저주파 전자기장 노출 수준이 높을수록 골수성 백혈병 발병률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다수 보고된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고온시험을 할 때마다 포름알데히드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점과 장시간 노동으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점 등도 인정됐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실지 조사 결과, 사업장 내 극저주파 전자기장은 기준치보다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는 공단 반박에도 재판부는 “근로자 3명을 대상으로 이뤄진 단 한 차례의 측정 결과가 14년간 근무한 망인의 누적 노출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공단은 지난 4월 2심(서울고법)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했다.
대법원도 항소심 논리를 수긍하고 원고 승소 판결을 확정했다.
유족측은 “8년이라는 긴 시간 끝에 대법원에서 산재를 인정받게 돼 기쁘다”면서도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납득하기 어렵다. 근로복지공단이 무리하게 상고한 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업무상 재해로 인해 직장과 가족을 잃고 당장 내일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노동자나 유족들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산재를 입증한다는 게 누가 봐도 쉽지 않은 것”이라며 “이 부분에서 제도가 분명히 개선되어야 할 것이고, 그러길 간절히 바란다”고 강조했다.
반올림은 15일 “공단은 사업주와 산업안전보건연구원 등 전문기관의 협소한 판단에 의존하지 말아야 하고, 극저주파 노출의 유해성에 대한 시각을 개선해야 한다”며 “산재보험법의 신속하고 공정한 보상 원칙이 훼손되지 않도록, 쉽고 빠르고 폭넓게 산재가 인정되도록 근본적인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고 했다.
김선일 기자 sikim@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