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상속세·최저임금, 프랑스 달구는 의제
좌파연합, 집권시 마크롱정책 뒤집는 경제개혁 다짐 … 르몽드 “경제학자들 의견 엇갈려”
지난 7일(현지시각) 치러진 프랑스 총선에서 좌파진영이 제1당에 오르며 정부운영에 참여할 가능성이 커지자 좌파의 각종 개혁의제가 프랑스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좌파연합 ‘신민중전선(NFP)’은 서민지원 공약으로 최저임금 인상, 물가상승률에 연동한 임금인상 등을 공약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연장하기로 한 정년도 다시 60세로 낮출 계획이다.
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몽드는 18일 “신민중전선은 신임정부 구성 첫 2주 동안 이같은 개혁을 추진할 계획”이라며 “해당 정책이 시행될 경우 2025년까지 1000억유로, 2027년까지 1500억유로의 추가 공공지출이 예상된다”고 전했다.
신민중전선은 해당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고소득층과 대기업을 대상으로 약 1500억유로의 세금을 더 걷을 계획이다. 마크롱 대통령이 폐지한 부유세를 재도입하는 내용이 이에 포함돼 있다.
르몽드는 신민중전선의 주요 개혁의제에 대해 경제학자들의 의견을 물었다. 전문가들의 의견은 입장에 따라 크게 갈렸다.
좌파정책 설계에 참여한 파리정치대학 줄리아 카제는 “공공서비스를 늘리고 불평등을 완화하기 때문에 막대한 경기부양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21세기 자본’을 쓴 토마 피케티의 아내이기도 하다.
반대로 오도&시에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 브뤼노 카발리에는 신민중전선의 정책이 시행될 경우 프랑스가 ‘석유 없는 베네수엘라’와 비슷한 시나리오가 펼쳐질 것으로 예상한다. 즉 프랑스의 장점이 무력화된다는 것이다.
르몽드는 “어떤 분석방법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해당 정책 영향력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며 “좌파의제에 대해 프랑스 전역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의제들은 차기정부에서 어떤 동맹들이 맺어질지 중추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했다.
어렵사리 시행된 정년연장, 다시 줄어들까
마크롱정부의 연금개혁은 지난해 초부터 프랑스 전역을 달궜다. 현행 62세인 정년을 점진적으로 늘려 64세로 연장한다는 것이다. 연금납입 근속기간을 늘려 연금지출 부담을 줄이겠다는 의도였다. 국민들의 대대적인 저항이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9월부터 시작됐다.
어렵사리 시행된 정년연장이지만 이번 총선에서 1당이 된 신민중전선은 집권할 경우 마크롱 대통령의 연금개혁을 폐지할 방침이다. 64세로 높아진 은퇴연령을 60세로 더 낮추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프랑스 네오마 경영대학원 경제학 교수인 질베르 세트는 정년연장이 경제의 원동력 중 하나인 고용률을 향상시키는 효과가 있다며 신민중전선 정책에 반대했다. 그는 “정년연장 연금개혁은 단순히 연금재원 조달에 관한 것이 아니다”라며 “무엇보다 노동공급을 늘려 경제를 부양하는 방법”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따라서 마크롱정부의 개혁은 수많은 사회적 조항으로 인해 연금재원 확충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35만개의 일자리를 추가하고 국내총생산(GDP)의 1%를 창출한다. 이에 따른 세금으로 국가에 약 130억유로의 수입을 가져다 준다”고 덧붙였다.
프랑스 경제전망연구소(OFCE)의 자비에 땡보 소장은 “연금지출 비용은 여러 변수에 따라 달라진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연금납입 근속기간”이라며 “납입기간을 현재의 42년 대신 45년으로 늘리고 점진적으로 44년으로 낮추면 현재 상황보다 연금지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저임금 인상엔 회의론 많아
신민중전선은 월 순최저임금을 현행 1400유로에서 약 14% 올려 1600유로(약 238만원)로 상향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에 대해 땡보 소장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 최저임금은 인플레이션과 연계돼 있다. 프랑스 최저임금은 구매력평가 기준으로는 이미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라며 “전체 노동자의 17%가 최저임금을 받고 있다. 기업의 임금협상이 험악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경제전망연구소는 신민중전선의 계획대로 최저임금이 오를 경우 약 3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고 추정했다. 또 최저임금 상승에 따라 각종 사회적 부담금 면제도 기계적으로 늘어나 이로 인한 예산비용이 70억유로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반면 최저임금 인상 정책안 수립에 참여한 파리8대학 경제학 교수 클레망 카보니에는 “스페인과 독일 캐나다의 최저임금 대폭인상은 고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네오마 경영대 세트 교수는 2022년 최저임금 전문가그룹 의장을 맡아 계량경제학 전문가들에게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을 의뢰한 바 있다. 세트 교수는 “연구결과 최저임금이 높을 때 고용에 부정적 영향이 강력함을 확인했다”고 지적했다.
런던정경대(LSE) 교수 자비에 자라벨은 “헝가리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으로 최저임금 일자리의 10%가 사라졌다”며 “이는 기업들이 추가비용을 소비자에게 전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범유럽 싱크탱크 ‘브뤼헐’의 장 피사니-페리 소장은 “미국의 경우 최저임금 인상이 일자리를 파괴하지 않지만, 프랑스처럼 거의 20%에 육박하는 노동자가 최저임금 대상자라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최저임금 대상자의 상황은 개선되겠지만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박탈감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좌파연합, 부유층 증세 다짐하지만…
신민중전선은 탈세 허점을 막아 250억유로를, 과세대상당 최대 1200만유로에 이르는 부유층 상속세를 도입해 170억유로를 확보할 계획이다. 또 14단계 소득세 기준을 도입하는 한편, 사회보장기여금(CSG)에 누진성을 강화해 55억유로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자본소득이 근로소득과 같은 수준으로 과세되도록 일률과세를 폐지해 27억유로를 더 걷어들일 방침이다.
이같은 정책 수립에 참여한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경제학자 앤-로르 델라트는 “긴축예산 상황과 공공서비스 현황을 고려할 때 1500억유로의 신규지출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며 “세수를 적극적으로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민중전선의 증세 대상은 재산이 500만유로를 넘는 부유층 고소득층 다국적기업이다. 델라트는 이 정책이 주로 부유세와 상속세를 개혁해 인구의 상위 1%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소득세를 개혁해 소득분배를 수정하겠다”며 “월 4200유로(약 640만원) 이상의 급여를 받는 소득상위 10%에 대한 세금을 누진적으로 인상하고 나머지 90%에 대한 세금은 줄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과거 사회당정부들도 부유층과 고소득층에 대한 증세를 시도했으나 의도와 달리 중소기업 약화, 투자감소 등의 결과로 이어진 바 있다. 프랑스 경제전망연구소 땡보 소장은 “1500억유로 재원마련은 고사하고 1000억유로조차도 의심스럽다”며 “우리는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한계점에 도달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즉 신민중전선의 증세계획이 잠재적으로 납세자들을 빈곤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납세자들은 소득세 등 외에도 누진적 일반 사회보장기여금(CSG)과 연금에 대한 추가 부담도 져야 한다.
브뤼헐의 피사니-페리 소장은 “프랑스인의 총세율은 60%에 달한다”며 “프랑스 과세율은 이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런던정경대 자라벨 교수는 “부의 불평등을 줄이려면 비용이 더 적게 드는 일을 모색해야 한다”며 사회적 이동성을 높이기 위한 교육투자를 예로 들었다.
경제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상속세가 불평등을 줄이는 데 효과가 있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상속세를 인상하는 방안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르몽드는 “신민중전선의 정책은 상속과 관련된 프랑스의 오랜 금기에 도전하는 것이다. 여론을 바꾸는 작업이 쉽지 않을 전망”이라며 “신민중전선의 의제는 과반정당이 없는 총선결과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신민중전선이 정권을 잡으려면 타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전 수석이코노미스트 올리비에 블랑샤르는 “이제 관건은 마크롱 정책과 신민중전선 정책의 요소를 혼합하면서도 대다수 의원들이 수용할 수 있는 경제정책 프로그램을 상상할 수 있느냐는 것”이라며 “나는 불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