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전세계 대상 금융제재…부작용 우려↑
워싱턴포스트 “전세계 국가 1/3이 금전적 불이익” … 제재남용 통제불능 비판도
현재 미국은 전세계를 대상으로 다른 국가나 국제기구들보다 3배 많은 제재를 가하고 있다. 전세계 모든 국가 중 1/3을 대상으로 사람, 재산 또는 조직에 일종의 금전적 불이익을 가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26일 “금융제재는 거의 반사적으로 사용되는 무기가 됐다”며 “제재 남용은 미정부 최고위층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들은 점점 더 이 도구를 거부할 수 없게 됐다”고 전했다.
제재가 확대되면서 워싱턴에 수십억달러 규모 산업이 생겨났다. 외국 정부와 다국적 기업들은 제재시스템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지출한다. 로펌과 로비업체들은 제재 담당 정부 관리들을 속속 고용해 그들의 전문성과 경험을 활용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미국은 올해도 기록적인 속도로 제재를 가하고 있다. 현재 전체 저소득 국가의 60% 이상이 어떤 형태로든 미국발 재정적 불이익을 받고 있다.
미 상무부 전 관리로 현재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선임고문인 빌 라인시는 “제재는 외교와 전쟁 사이의 유일한 수단이며, 따라서 미국의 무기고에서 가장 중요한 외교 정책도구가 됐다”며 “하지만 정부 내에서는 이 전략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9.11 이후 ‘전가의 보도’ 된 제재
경제전쟁은 수천년 역사를 갖고 있다. 기원전 5세기 고대 아테네가 적국에 무역제재를 가했다. 미국 대통령들은 건국 초기부터 대외무역을 제한했다. 1807년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항구를 폐쇄해 수출선박을 통제하고 영국으로부터의 수입을 제한했다.
1990년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은 이라크에 대한 국제적인 수출 봉쇄라는 새로운 형태의 무기를 탄생시켰다. 걸프전 이후 포괄적인 제재로 이라크는 석유 수출이나 파괴된 수도·전력시스템을 재건하기 위한 물자 수입이 불가능해졌다. 때문에 콜레라와 장티푸스 등의 질병이 급증했다.
소련이 붕괴하면서 미국은 경제나 군사적으로 세계 최고 초강대국이 됐다. 반면 전세계 정부와 은행은 기축통화인 달러에 의존하고 있었다. 달러는 미국경제에 대한 접근을 가능케 할 뿐 아니라 미국 은행이나 기업과 관련이 없는 경우에도 국제무역을 매개한다. 석유와 같은 상품은 전세계적으로 달러로 가격이 책정된다.
따라서 미국 금융시스템을 규제하는 재무부는 전세계 은행의 게이트키퍼 역할을 한다. 재무부는 미국경제나 외교정책, 국가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외국의 모든 개인과 기업, 정부에 제재를 가한다.
제재시스템은 서서히 구축됐다. 초기목표는 공산주의 쿠바 외에도 멕시코 콜롬비아 등 마약카르텔이 활동하는 국가, 리비아 같은 불량정권이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은 소수의 제재프로그램을 시행하는 업무만 담당했다. 직원들에 할당된 건 회의실 한칸뿐이었다.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쿠바산 시가의 미국 내 판매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2001년 9.11 테러공격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미의회는 금융기관이 소비자거래기록을 보관하고 이를 법집행기관에 넘기도록 강제하는 법안을 제정했다. 디지털금융의 부상으로 전세계 자금흐름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이 생기면서, 미국 재무부는 한순간 전세계 은행고객에 대한 방대한 양의 정보를 보유하게 됐다.
재무부가 테러와의 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면서 미국 정책입안자들은 금융패권의 힘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개념증명은 곧 구체화됐다. 2003년 북한이 핵무기조약에서 탈퇴하면서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재무부는 북한과 관련한 결제업무를 처리하던 마카오은행을 표적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이 은행과 거래하는 모든 은행을 위협했다. 이 조치로 북한 재정은 큰 타격을 입었다. 재무부 직원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총 한발 쏘거나 돈 한푼 쓰지 않고 지구 반바퀴 떨어진 적을 겁먹게 했기 때문이다.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재무부 금융범죄단속네트워크(FinCEN)에서 고위직을 역임하고 현재 시러큐스대학에서 제재정책을 가르치는 크리스틴 파텔은 “이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며 “재무부는 제재라는 망치로 두들겨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제재정책은 곧 더 큰 목표와 더 공격적인 집행으로 전환됐다. 2010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란의 핵 야망을 포기하도록 만들기 위한 제재를 승인했다. 미국은 재무부 제재를 무시한 서방은행들에 수십억달러 벌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제재는 이란뿐만 아니라 이란과 거래하는 기업에도 적용돼 이란과 국제시장의 연결고리를 약화시켰다. 결국 이란은 금융고립의 종식을 약속하는 핵협상을 모색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힘의 과시는 새로운 대상들로 이어졌다. 오바마 2기 임기에는 콩고민주공화국 군 관리, 예멘 군 공급업체, 리비아 관리, 시리아 알 아사드 대통령 등 점점 더 많은 인물이 제재대상에 올랐다. 미의회도 미국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과의 경쟁을 차단하려는 의도로 보이는 제재 요청을 국무부와 백악관에 쏟아냈다.
일부 전문가들은 제재 급증세가 통제불능으로 치닫고 있다고 본다. 20여년 전 제재 아이디어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한 노트르담대 교수 조지 로페즈는 “제재는 국가적 범죄와 취약성에 맞게 부과하는 선택의 뷔페가 돼야 한다”며 “하지만 정책입안자들은 뷔페에 들어와 ‘내 접시에 모든 것을 쌓아놓겠다’고 말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오바마정부에서 OFAC 선임고문을 지낸 애덤 스미스는 “정부 부처마다 ‘왜 이 사람들에게 제재를 가하지 않느냐’는 요청과 의견이 쏟아졌다”며 “민주당 지지자든 공화당 지지자든 상관없이 항상 ‘왜 제재를 지속하지 않느냐’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제재 집행 어려울 정도로 급증
미정부는 제재시스템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과 병합에 따라 미 재무부는 러시아 동맹국과 국영은행 등을 겨냥한 제재를 발동했다. 하지만 크림반도 상황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유럽 각국 지도자들은 자국은행에 부과된 벌금에 분노했다. 월가는 어지러운 새 지침을 준수하는 데 드는 비용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했다.
제재대상 기관의 수가 너무 빠르게 증가해 OFAC가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혼란이 가중되면서 대상 기관의 해명요청이 쇄도했고, OFAC를 상대로 한 소송건수가 3배 증가했다. 재무부 직원들이 수입을 4배 늘릴 수 있는 민간기업들을 찾아 떠나면서 이직률도 높아졌다.
보다 실존적인 문제도 등장했다. 제재의 힘은 외국 행위자들의 달러접근을 막는 데 있다. 하지만 제재로 인해 달러에 의존하는 것이 위험해지면 각국은 이를 완전히 피할 수 있는 다른 거래방법을 찾을 수 있다. 2016년 3월 오바마정부 잭 루 재무장관은 “제재의 과잉과 남용은 궁극적으로 제재의 효력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뒤이은 트럼프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제재를 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심지어 아프가니스탄 내 미군의 행위에 대해 전쟁범죄조사를 개시한 국제형사재판소 관계자들에게 제재를 가하는 등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보복했다. 트럼프정부는 또 니콜라스 마두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베네수엘라에 막대한 제재를 가했다. 하지만 마두로를 축출하는 데 실패했고, 현대 역사상 최악의 평시 경제붕괴를 유발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미 상원 외교위원회 선임 참모이자 부시정부 시절 국무부 쿠바정책 책임자였던 케일럽 맥캐리는 “제재가 너무 많이 남용돼 통제불능상태가 됐다”고 말했다.
바이든정부, 제재개혁 보류
바이든정부 초기 제재정책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2021년 여름 재무부 직원 5명이 제재시스템 개편을 제안하는 초안을 작성했다. 약 40쪽에 달하는 초안은 수십년 만에 가장 실질적인 제재정책 개편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이전 행정부들과 마찬가지로 바이든정부도 권력을 포기하기 어려웠다. 재무부 고위직들은 ‘제재조정관 신설안’ 등 개편계획의 핵심내용을 들어냈다. 그해 10월 재무부가 ‘2021 제재 재검토 문서’를 공개했을 때 40쪽 분량 초안은 8쪽으로 축소됐다. 4개월 뒤 러시아군대가 우크라이나로 진격했다. 바이든정부는 2년여 동안 6000건 넘는 전례 없는 제재를 단행했다.
2022년 말 백악관은 제재개혁 논의에 재착수했다. 바이든 대통령을 포함한 비공개회담에서 보좌관들은 ‘평화와 안보를 뒷받침하는 핵심 국제원칙이 위협받는 순간’으로 제재 사용을 제한하는 등 지침을 설정할 필요성을 논의했다고 한 관계자가 전했다. 하지만 이같은 아이디어는 보류됐다.
오바마정부 국가안보 부보좌관을 지낸 벤 로즈는 “워싱턴에는 ‘전세계 어디에서든 나쁜 일이 발생하면 제재해야 한다’는 거의 반사작용에 가까운 사고방식이 있다. 이는 말이 안된다”며 “전쟁에 부수적 피해가 있는 것처럼 제재에도 부수적 피해가 있다. 이를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