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장맛으로 한식 품격 높여 … 세계에서 찬사
세계 요리장, 남도 장맛 공부에 명인 찾아
장 담그기, 국가무형유산 제137호로 지정
지난 1년간 17개국에서 탄생한 24명 미슐랭 스타 요리장(셰프)이 앞 다퉈 한국 발효음식을 탐구하기 위해 찾은 곳이 있다. 전남 담양군 창평면에 있는 양진재 종가 장고(裝庫)다. 셰프들은 이곳에서 한식 전통 장(醬) 담그기를 직접 익힌다. 담근 장은 셰프 이름표를 단 항아리에서 숙성돼 세계 각국에 있는 셰프 음식점으로 공수돼 활용된다.
세계 최고 음식점으로 인정받는 뉴욕 ‘르 베르나댕(Le Bernardin)’의 에릭 리퍼트(Eric Ripert) 셰프와 덴마크 ‘노마(Noma)’ 르네 레드제피(Rene Redzepi) 셰프도 이곳 장맛에 일찍이 매료돼 찬사를 보냈다.
2019년 종가의 장은 전 세계 식품 동향을 이끄는 프랑스 파리 르봉마르셰 백화점 식품관 입점을 시작으로 미국 아마존 및 일본의 큐텐 재팬 등 해외 유수의 온오프라인 매장까지 수출을 확대했다.
2017년에는 트럼프 대통령 방한 만찬에 사용된 사실이 세간에 알려져 화제가 됐고, 이후 미국 백악관 만찬 때 딸기 고추장을 선보여 세계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이 장고에는 남도 장맛을 한평생 지키며 한식의 위상을 세계에 알린 장인(匠人)이 있다. 바로 식품명인 제35호로 지정된 기순도(76) 명인이다.
◆세계가 주목한 기순도 명인 = 명인은 1972년 전남 담양 고씨 문중의 10대 종부로 시집 와 가문 전래 비법으로 장을 담그는데 한평생을 바쳤다. 44살이 되던 해에 주위 권유로 가문의 장을 사업화했는데 당시 50개였던 항아리가 1200개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다.
종가 마당에 들어서면 대나무와 소나무에 둘러싸인 1200여개 항아리 도열에 맞닥뜨린다. 그야말로 장관이다. 인터뷰 전날에도 CNN과 온 종일 촬영했다는 명인은 피곤한 기색도 없이 종가를 방문하는 손님에게만 내어준다는 간장 차를 권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명인에 따르면 우리 전통 장을 대표하는 것은 간장으로 장맛의 최고 결정체다. 그중에서 명인의 내력을 인정받은 진장은 장맛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진장은 오래 묵혀 진해진 간장이라는 의미지만 명인의 진장은 시간 개념을 초월한 맛을 낸다.
우선 메주를 1년간 우려 낸 간장을 별도의 항아리에서 다시 4년간 더 숙성시켜 완성하는 장이다. 이 과정에서 진한 감칠맛과 단맛이 감도는 진장이 완성된다. 이렇게 만들진 명인의 진장은 유명 간장 제조사인 기꼬망에서도 관심을 갖고 연구할 정도로 주목받고 있다.
“한식은 발효를 빼고 이야기를 할 수 없어요. 특히 남도는 발효의 고장이지요. 저는 찾아오시는 외국 손님들에게 꼭 청국장을 끓여서 대접해요. 오랜 숙성과 자연 발효가 새로운 미식의 기준이 되고 있는 것 같아서요.” 명인의 얘기를 듣다 보니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명제를 새삼 실감했다.
◆기후온난화를 극복한 장고 = 요즘 회자되는 전통 한식은 대체로 궁중 음식과 반가 음식을 기반으로 하는 서울지역 음식을 중심에 두지만 발효 음식만큼은 남도가 중심이다.
남도는 발효 음식이 탄생하기에 딱 좋은 조건을 갖췄다. 우선 산과 들, 바다와 갯벌에서 각종 산해진미가 풍부하게 생산된다.
그렇지만 기온이 높아 부패하기 쉬워 이들을 오래도록 보관해 먹기 위해 발효 기술을 활용한 저장 음식이 발달했다.
그 중에서도 담양의 자연은 예로부터 좋은 물과 맑은 공기, 순한 바람과 해안보다 적은 기후변화로 장의 맛과 순도를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다.
이런 천혜의 자연환경도 기후변화를 피해갈 수 없었다. 지구온난화로 봄은 짧고 여름이 길어졌다. 여름이 길어져 기온이 높아진 탓에 간장은 더 달아졌고 된장은 덩달아 까매졌다. 서식하는 곰팡이 종류에도 변화가 생겼다. 명인은 변화된 자연환경에 대응해 메주 크기를 절반으로 줄이고 발효 기간도 단축했다.
장독대 온도를 낮추기 위해 주변에 맨드라미와 봉숭아 등을 심어 장항아리에 그늘이 지도록 했다. 아름답고 소박한 꽃밭에 둘러싸인 어린 시절 장독대 풍경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기후변화 위기를 자연에 대한 순응으로 대처하는 명인의 지혜가 너무 인상적이다.
“장을 담근 지 50년이 넘었어요. 그런데도 여전히 장을 뜰 때 가슴을 졸여요. 그래서 장 담그는 날을 받고 철륭제를 지낸 후에 장을 담가요. 그걸 안하면 아마 병이 날 거야(웃음) ….”
명인은 지난 50년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이 과정을 반복했다. 명인 장독대는 무척이나 정갈했는데 장을 담그는 과정뿐만 아니라 항아리 하나하나를 소홀히 하지 않고 돌본 덕분이다. 이런 정성이 모여 음식의 맛을 결정한다는 게 명인의 오랜 믿음이다.
◆장맛 좋은 집은 음식도 달다 = 종가는 같은 음식이라도 특별한 방식을 고집하며 가풍에 따른 고유한 음식 맛을 지켜왔다. 특히 종가의 장은 그 집안의 기품과 격조를 보여주는 표상이라 할 수 있다.
명인의 장은 직접 생산한 죽염을 사용한다. 3년 이상 된 담양 왕대에 천일염과 지장수를 섞어 1500도가 넘는 소나무 장작불에 아홉 번을 구워낸 소금이다. 이 죽염을 장 담글 때 사용하면 짠맛은 줄고 감칠맛이 더해진다. 명인의 장은 메주 사용량이 많고 숙성 후 간장을 많이 빼지 않는다. 이게 기순도 장맛의 비법이다.
명인은 음식 간을 반드시 간장으로 맞춘다. 간장은 발효기간에 따라 이름이 따로 있고 쓰임도 다르다. 숙성 시간에 따라 1~2년은 청장, 3~4년은 중간장, 5년을 넘기면 진장이라 한다. 청장은 나물이나 국의 간을 맞추는데 사용하고, 중장은 일반 음식에 두루 쓴다. 진장은 육포나 조림 약식 등을 만들 때 쓰인다. 취재를 위해 명인은 간장 용도에 맞춰 조리한 다양한 종가 음식을 소개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음식이 ‘간장 김치’다. 소금과 젓갈 대신 명인의 중간장을 사용해 담근 것으로 아삭한 식감과 함께 깔끔하면서도 특유의 깊은 맛을 냈다. 종가를 방문한 외국인들도 이 김치는 부담 없이 먹는다고 한다.
청장으로 무친 나물도 일품이다. 명인은 나물 종류에 따라 수분을 빼는 정도가 전부 다르다고 했다. 명인은 나물에 애벌 양념을 한 후 물기를 짜고, 먹기 직전에 다시 양념하는 것이 비법이라고 귀띔했다.
육전과 김부각 밑간에는 귀한 진장이 쓰였다. 진장의 그윽한 풍미가 음식의 품격을 높였다.
종가의 손님상에는 담양 특산물인 죽순 요리가 빠지지 않는다. 백악관 만찬 요리로 유명해진 바로 딸기 고추장 양념의 죽순 무침이다. 은은한 단맛이 도는 매콤함이 죽순의 향을 더욱 감미롭게 만들었다. 이 고추장은 샐러드와 궁합이 좋고 맵지 않아 어린이나 어르신, 외국인 선호도가 높다.
명인이 마지막에 소개한 ‘즙장’은 별미 중 별미였다. 이 장은 과거 전라도 지방에서 집집마다 담가 먹던 속성 장으로 가을 음식이라고 했다. 명인의 즙장은 찹쌀 죽에 메줏가루와 함께 절인 고추와 고춧잎, 무와 무청 등을 넣고 버무린 후 항아리에 넣고 숯불을 올린 화덕에서 일주일간 발효시켜 완성한다. 밥 위에 올려 비벼 먹으니 짭조름하면서도 신맛과 단맛의 조화가 일품이다.
명인은 해외 출장을 다니면서 채식 식단으로 우리 한식의 가치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미 완성형에 가까운 한식 채식 식단의 중심에 장이 있다. 해외에서도 이미 한국의 장을 사용해 새로운 채식요리를 만들어 내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무심하게 전통을 지켜내면서도 유행을 짚어내는 명인에게서 50여 년 내공을 엿볼 수 있었다.
명인의 음식은 쉽고 단순하며 맛있다. 그런 요리를 한다는 건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 가능한 일이다.
◆370년 종가의 전통 장맛 전파 = 2023년 10월. 한국 음식의 근본이자 문화유산인 전통 장 제조법을 지키고자 ‘기순도 발효학교’를 열었다.
학교에선 발효와 전통 장 이론 교육, 메주와 각종 장류 제조 실습을 병행한다. 학교 개설에 앞서 수년 동안 해외 유명 요리학교에 ‘장 담그기 모형’을 보내는 일을 계속했다. 고단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한식 문화를 배우려고 오는 이들을 보면서 멈출 수 없었다.
국내에선 이화여대에서 해마다 전통 장 담그기 강의를 해왔다. 명인은 전통 장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젊은 세대를 마주할 때면 걱정이 앞선다.
“전통 장이 우리 한식의 뿌리예요. 외국 셰프를 많이 만나고 출장도 가면서 생각이 많아졌어요. 우리 전통 장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또 누구한테 듣고 배울지가 중요해요.”
명인은 전통 장의 보급을 확대하고 후세들의 접근을 쉽게 할 수 있도록 전통 장류에 대한 지역별 특색, 종가 대물림 장에 대한 과학적 분석 및 기록 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담그기는 2018년 12월 국가무형유산 제137호로 지정됐다. 장 담그기는 문화유산 중에서도 특정 보유자나 보유 단체를 지정하지 않은 ‘공동체 종목’이다. 국가유산청은 장 담그기가 우리나라 전역에서 가정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전승되는 생활 관습이라는 점에서 ‘공동체 종목’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우리 간장과 김치의 왜곡이 끊이지 않은 상황에선 한식 전통 장의 품질 표준을 확립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동시에 이를 지켜온 명인을 보호하고 자부심을 높이는 일 또한 놓쳐선 안 될 일이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한식에서 발효의 의미가 그렇다.
남도의 발효 음식은 한평생 전통을 지켜온 명인들과 이를 동시대의 감각으로 풀어내는 셰프들, 그리고 미식의 가치를 추구하는 세계인을 만나 그 범위를 더욱 넓혀 가고 영원할 것이다.
이범준 교수 / 제주한라대학교 호텔외식경영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