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노동유연화’ 더 치열하게 논의해야

2025-03-17 13:00:03 게재

지난주 정치권에서 의미 있는 정책토론회가 열렸다. 제1야당이자 국회 제1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중소기업인과 전문가들을 초청해 주52시간근무제도 개선 등 기업들의 현안에 대한 해결책을 논의한 것이다. 토론회에서는 “주52시간제를 업종별 현장 상황에 맞게 더욱 탄력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등 논의가 활발했다.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현행 주에서 월(月) 및 분기, 연(年)으로 바꿔야 한다는 건의도 나왔다.

축산육가공업을 하는 기업인은 “구제역 같은 전염병이 발생하면 출하가 끊기는데도 직원들 임금은 줘야 해 애로가 크다”며 “출하가 재개돼 주문이 몰리는 시기에 작업시간을 늘려 손실을 회복하고 그 성과를 직원들과 나누려고 해도 주 52시간 벽에 막혀 있다”고 하소연했다. 경직적인 제도 운영으로 인해 ‘보호 대상’인 노동자들이 애꿎게 고충에 빠지는 사례도 제시됐다. “기업 현장문화가 예전 같지 않아 직원들 간에 서로의 일을 대신 해주지 않는 곳이 많다. 결혼 등 특별한 사유로 장기 휴가를 다녀온 직원이 복귀한 뒤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추가근무를 하고 싶어 해도 지금의 제도로는 불가능하다”(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는 증언이 그런 경우다.

주52시간제 업종별 현장별 탄력 적용 건의 봇물

토론회를 주최한 권칠승 민주당 의원은 “기업 현장의 애로사항을 정확하게 파악해 실효성 있는 해결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반갑고 든든한 얘기다. 권 의원은 문재인 정부에서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지낸 중진 정치인인데, 민주당에는 이런 베테랑들이 많이 있다. 국회 절대다수의석을 가진 민주당이 집권시절 축적한 경험을 살려 좀 더 적극적으로 일선 기업과 노동자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침체위기에 빠져있는 경제현장에 한결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지난주 산업통상자원부와 고용노동부가 공동 주최한 간담회에서도 기업인들은 주52시간제도의 경직적인 운영으로 인한 고충을 쏟아냈다. ‘뿌리산업’으로 불리는 금형업계는 주 52시간제 도입 이후 수출이 30% 급감하는 위기를 겪고 있다고 했다. 한 특수금형업체는 올 초 일본 자동차업체로부터 50억원 규모의 자동차용 알루미늄 금형 주문을 받고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단다. 주 52시간 근무제로 직원들의 근로시간을 갑자기 늘리는 게 불가능해 6개월이란 납기를 맞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작(新作) 출시에 맞춰 집중적으로 일해야 하는 게임업체들도 획일적인 주 52시간제도 운영이 족쇄로 작용해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고, 오랜만에 중흥시기를 맞은 조선업계도 같은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민주당과 노동단체는 예외 규정을 활용하면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게 일선 기업인들 얘기다. 특별연장근로 인가제도는 ‘사람의 생명 보호·안전 확보를 위한 긴급 조치’ ‘업무량 대폭 증가로 사업에 중대한 지장 초래’ 등 요건을 증명하는 게 까다로워 활용도가 낮다. 근로자의 동의를 일일이 받고, 매번 정부 승인 절차를 거치다 보면 적기에 고객사 요구를 맞추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고 한다. 탄력근로제와 선택근로제는 노조가 반대하면 아예 실행할 수가 없다.

대한민국이 고도성장을 질주해 온 이면에 세계 최장시간 노동국가라는 그림자가 드리웠던 게 사실이고, 지난 정부에서 여야 합의로 노동자들의 근로시간을 주52시간 이하로 제한하는 법안이 제정된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막상 시행해보니 여러 부작용이 빚어지고 있음이 거듭 확인되고 있다. 민주당의 이재명 대표도 지난달 반도체특별법 제정을 위한 당내 토론회 좌장을 맡은 뒤 “당사자들이 동의할 경우 예외로 몰아서 일하게 해주자는 게 왜 안 되냐고 물어보는데 할 말이 없더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일선 기업과 중소 노동자들의 절박한 하소연 끊이지 않는 현실 직시할 때

상황이 이런데도 주52시간제도의 개선이 한 발짝도 이뤄지지 않는 데는 거대 노동자단체인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등이 완강하게 반대하는 탓이 크다. “조금의 예외라도 허용되면 어렵게 시행한 제도의 기반이 흔들리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지만, 일선 기업과 중소 노동자들의 절박한 하소연이 끊이지 않는 현실을 직시할 때가 됐다. 민주노총은 대기업과 공기업 등 형편이 좋은 사업장 노동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단체여서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힘겨운 처지에 눈감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터다.

한국 노동시장의 경제 자유 수준이 세계 184개국 중 100위에 불과하다는 보고서(미국 헤리티지재단)가 최근 발표됐다. 낮은 고용 유연성과 함께 획일적인 주 52시간 근로제가 주된 요인으로 제시됐다. 그냥 흘려 넘길 얘기가 아니다.

이학영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