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지는 ‘헌재 참사’ 우려…여야, 말로만 ‘판결 승복’
2017년 박근혜 탄핵 뒤 헌재 앞에서 시민 4명 사망
여야, 경쟁적으로 거리로 … “불복 부추긴다” 비판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이정미 당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이 권한대행은 낭독을 시작한 지 21분 만에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주문을 선고했다. 헌재 앞에 운집해있던 박 대통령 지지자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경찰 저지선을 뚫고 헌재로 돌격을 시도했다. 격렬한 몸싸움이 일어났고 이 와중에 집회 참석자 4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벌어졌다. 박 대통령 탄핵을 놓고 찬반세력이 수십 일 동안 충돌한 끝에 4명이나 사망하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17일 정치권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가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오는 가운데 “2017년 참사가 되풀이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다. 이번에는 2017년보다 찬탄파(탄핵 찬성)와 반탄파(탄핵 반대) 사이 충돌이 더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헌재 선고 이후 심각한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걱정이 쏟아진다. 하지만 참사를 막아야 할 책임을 진 정치권에서는 선고를 앞두고 경쟁적으로 거리로 나서 찬탄과 반탄을 목 놓아 외치고 있다. 여야의 거리투쟁은 찬탄과 반탄으로 갈라진 시민을 자극하면서 참사를 부추기는 꼴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선고를 앞둔 지난 주말, 여야는 경쟁적으로 거리로 나서 찬탄·반탄 주장을 쏟아냈다.
17일 국민의힘 의원(108명)의 절반을 넘는 62명은 지난 11일부터 1주일째 헌재 앞에서 탄핵 기각·각하를 요구하는 릴레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지난 15일에는 나경원 윤상현 이만희 의원 등이 경북 구미에서 열린 반탄 집회에 참석했다. 윤 의원은 “불굴의 박정희 정신으로 재무장해서 탄핵 심판이라는 불구덩이에 놓여있는 윤 대통령을 구출해내고,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광화문 반탄 집회에는 박대출 의원이 참석해 탄핵 반대를 외쳤다. 지난 12일에는 여당 의원 82명이 서명한 탄핵 각하 탄원서를 헌재에 제출했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도 장외투쟁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민주당 등 야 5당이 참여하는 ‘윤석열 탄핵 야 5당 국회의원연대’는 17일 광화문에서 헌재의 탄핵 심판 선고를 촉구하는 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무엇이 두려워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인지, 누구를 위해 시간을 끄는 것인지 묻고 싶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날 오후에는 찬탄 시민들이 참석하는 ‘탄핵 촛불문화제’를 개최한다. 민주당 의원들은 16일에는 국회에서 광화문까지 도보 행진을 벌이며 윤 대통령 파면을 촉구했다.
여야가 경쟁적으로 거리로 나서면서 찬탄과 반탄으로 갈라진 시민들은 더 흥분하는 분위기다. 여야 지도부는 말로는 “헌재 판결에 승복하겠다”고 하지만 다수 의원은 거리에서 선동을 일삼으면서 불복을 부추기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권성동 원내대표는 16일 “당의 공식 입장은 헌재 판단에 승복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도 “헌재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것은 법치국가에서 헌법 수호 의지를 가진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지도부조차 돌아서면 찬탄과 반탄을 외치면서 시민들의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도 여야의 실질적 승복 의지를 통해 지지자들의 흥분을 가라앉혀야 한다고 주문한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은 “헌재의 결정이 자칫 내전과 유혈사태의 도화선이 되어 대한민국을 뒤흔들 수 있다는 위기감이 극에 달하고 있다”며 “여야 지도부는 초당적 승복 메시지를 발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안 의원은 윤 대통령을 향해 “어떤 결과든 따르겠다는 진정성 있는 대통령의 승복 메시지는 국가 혼란과 소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큰 울림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두관 전 민주당 의원은 “국민이 탄핵 찬반으로 갈라져 광장에서 분노하는 상태가 지속되면 헌재 심판 결과가 어떻게 나든 대한민국은 봉합되기 어렵다”며 “헌재 심판에 승복하는 여야 지도부 공동 기자회견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엄경용 기자 rabbit@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