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패배로 미 개입주의 외교 막 내릴까

2016-11-23 10:10:49 게재
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당선됐다. 어떤 이는 '서구문명의 종말적 현상'이라며 패닉에 빠졌고, 또 다른 이는 '미국의 독단적 제국주의가 종언을 고할 것'이라고 안도한다. 튀니지 카르타고대학 국제법 연구교수인 마르웬 보우아씨다는 22일 온라인매체 '카운터펀치' 기고문에서 "아프리카와 중동, 중남미 아시아 개발도상국을 포괄하는 글로벌사우스(Global South)의 보편적 정서는 트럼프의 당선이 아니라 클린턴의 패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그는 트럼프 당선자가 이끌 미국이 이전의 구습을 청산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다음은 기고문 전문.


그 누구도 미래를 점칠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미국의 개입주의가 종언을 고하고 고립주의가 부활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한 시대가 가고 또 다른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10월 27일 필리핀 시민들이 필리핀주재 미 대사관 앞에서 "미국은 군사·외교적 개입을 중단하고 군대를 거둬 돌아가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시위대 중 한 명이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최고 테러리스트'라는 내용의 팻말을 들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옳든 그르든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힐러리 클린턴의 패배는 이같은 예상에 힘을 얹고 있다. 클린턴의 패배에 어떤 이는 좌절할 것이고 어떤 이는 기뻐할 것이다. 공화당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를 놓고 가족 내에서조차 상반된 반응을 보인다. 이데올로기와 가치체계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럼프 승리에 대한 가장 극명한 분열은 자유주의적이든 사회주의적이든 좌파 내에서 일어나고 있다. 아프리카와 중동, 중남미 아시아 개발도상국을 포괄하는 글로벌사우스(Global South)와 북미·유럽 등 선진국을 포괄하는 글로벌노스(Global North)가 명확히 갈리기 때문이다.

선진국 좌파들은 트럼프 승리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반면, 개도국과 중후진국 좌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트럼프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클린턴을 온몸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글로벌사우스는 힐러리든 남편 빌이든 상관없이 '클린턴'이라는 이름을 '인도주의적 개입'과 동의어로 이해한다.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담론이 글로벌노스의 지식인들을 매혹시켰다면, 아래쪽 사람들은 그 거짓과 위선에 치를 떤다. 코소보나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에서 인도주의라는 이름으로 끔찍한 재난이 자행됐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글로벌사우스 사람들은 더 이상 인도주의적 개입에 환상을 품지 않는다.

따라서 트럼프의 승리는 글로벌사우스 사람들에게 위안이자 변화에 대한 희망이 되고 있다. 빌 클린턴과 조지 부시, 버락 오바마로 이어지는 외교·군사적 개입정책이 끝나리라는 기대감에서다.

미국의 인도주의적 개입은 '민주주의 이식론'이나 '국가건설론'이라는 명목으로 지구상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나라와 문명을 파괴했다. 복지를 확산한다고 했지만 비극을 가져왔다.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외피를 썼지만, 독재정권을 심었다.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인도주의적 개입이 이슬람 땅에 '지하드'(성전)라는 이름의 테러를 촉발시켰다는 사실을 미국은 진정 모르는가. 미국이 세속주의를 표방한 국가에만 개입해 나라 전체를 종교적 극단주의 투쟁에 빠뜨리는 건 우연의 일치인가. 미국은 음모론이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역사적 근거는 차고 넘친다.

미국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는가. 잘못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나라인가. 알카에다와 이슬람국가(ISIS)가 왜 출현하게 됐는지 모르는가. 그들이 스스로 생겨났는가, 아니면 누군가가 훈련시키고 자금을 댔는가.

유고슬라비아와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에서 각각 수천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 이들의 죽음이 이 나라의 복지확산에 기여했는가. 빌 클린턴 행정부가 내린 경제제재로 이라크 내 의약품이 부족해져 약 50만명에 달하는 이라크 아이들이 병마에 죽었다. "꼭 그랬어야 했는가?"라는 질문에 미국은 답할 수 있는가.

중동에서는 미국의 인도주의적 개입을 '새로운 성전'으로 인식한다. 민주주의를 이교 또는 무종교로 인식한다. 모더니티(근대성)를 종교배반으로 인식한다. 인권을 신의 섭리에 반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세속주의를 참수형으로 다스려야 할 무종교로 인식한다.

미국이 내세웠던 '보편적 가치'는 해결책이라기보다 문제의 화근이 됐다. 인도주의적 개입은 도움은커녕 형벌이 됐다.

글로벌노스가 놓치고 있는 것을 글로벌사우스는 인식하고 있다. 자의적 선택에 따른 인도주의적 개입은 침략과 형벌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나라를 벌주는 것이고 미국과 그 동맹국의 헤게모니 유지를 위한 새로운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90년대 초 소비에트연방(소련)이 붕괴한 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새로운 존재근거를 만들어야 했다. '인도주의적 개입'이 좋은 구실이 됐다. 이를 핑계로 러시아를 억압하고 글로벌사우스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줄여나갔다.

2000년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제3세계 국가들 모임인 G77이 열렸다. G77은 만장일치로 "글로벌노스의 개입은 주권국의 존엄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며 "인도주의적 목적을 포함한 어떠한 개입주의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이 성명은 1999년 빌 클린턴 독트린에 대한 명확하고 단호한 거부였다. 클린턴 행정부가 코소보전쟁 중 내세운 독트린으로,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명목으로 미국의 침략외교정책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이는 힐러리 클린턴을 국무장관에 임명한 오바마 행정부에서도 계승돼 확장됐다.

트럼프, 타국 전복 시도 않겠다지만…

그렇다면 클린턴의 패배와 트럼프의 승리가 미국 개입주의 외교의 종언을 예상할 만큼 충분한가.

국수주의자인 트럼프는 공화당 내 반 개입주의자들과 연합해 승리를 거머쥐었다. 트럼프는 11월 4일 선거기간 중 자신의 외교정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미국은 국가안보에 꼭 필요한 경우에만 군사력을 사용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이식하고 다른 나라의 정권을 전복하려는 시도를 끝낼 것이다. 우리는 개입할 권리가 없는 상황에 참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선거기간 중 내뱉은 발언을 근거로 미국의 외교정책을 예단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현재시점에서 트럼프의 외교정책을 추측하는 건 설익다. 아직 외교라인을 짜지도 않은 그에게 중동과 관련한 정책을 예상할 수 없다. 게다가 내년 1월 대통령직에 취임하면 이전 입장을 번복하기란 누워서 떡먹기처럼 쉽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대표적 사례다.

트럼프처럼 부시 대통령 역시 비 개입주의 외교관을 가진 보수적 공화당원이었다. 그도 '미국 우선주의'(American First)를 외쳤다. 비둘기파로 분류되는 콜린 파월을 국무장관에 임명해 온건한 중동정책을 예고했다.

하지만 임기 중 역대 어느 정권보다 공격적이고 침략적인 외교정책을 들고 나왔다. 혹자는 2001년 9.11 사태를 이유로 든다. 하지만 부시 내각의 면면을 보면 폭력의 씨앗은 이미 심어져 있었다. 네오콘이 부시 행정부의 핵심 요직을 속속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트럼프 당선자가 네오콘과 연결돼 있다는 정황은 불확실하다. 가장 잘 알려진 네오콘은 폴 울포위츠 전 국방차관과 윌리엄 크리스톨 '위클리스탠더드' 편집장, 로버트 케이건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 등이다. 이들은 클린턴 후보를 지지하는 패착을 둬 트럼프와 멀어졌다.

대중에 덜 알려지긴 했지만 이들 못지않은 영향력을 자랑하는 네오콘으로는 딕 체니 전 부통령과 노만 포드호레츠 '코멘터리' 칼럼니스트, 제임스 울시 전 CIA국장 등이 있다. 이들은 이런저런 인맥으로 트럼프와 연결될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다. 클린턴과 비교해 상황이 더 나아질 가능성이 낮은 이유다.

트럼프가 약속한 '비 개입주의'가 반드시 고립주의 정책으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비 개입적 외교정책을 표방한다고 해서 미국이 자국의 이해관계를 억지로 관철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면 오산이다. 오히려 자국의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에 보다 독단적이고 공격적인 외교를 펼칠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트럼프가 국방과 군산복합체에 대한 예산을 늘릴 것이라고 약속한 점을 보면 특히 그렇다. 트럼프가 이끄는 미국은 글로벌사우스와 중동에 이해관계가 걸려 있을 경우 적극적 개입주의 외교를 편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보면 트럼프의 승리와 클린턴의 패배만으로 미국이 고립주의에 종언을 고할 것이라고 보는 건 설익은 판단이다. 개입주의의 한 시대가 가면 또 다른 개입주의의 시대가 온다. 정치적 현실은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대선후보가 선거기간에 내뱉은 말을 잣대로 판단할 수 없다. 당선자 신분에서도 그렇고, 심지어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도 마찬가지다. 그 누구도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는 알 수가 없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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