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태정 변호사의 범죄파일 | (3) 블랙아웃 사건
엉겁결에 한 사과, 발목 잡는다
평범한 남자 대학생 A씨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여자 동기 B와 간만에 만나 회포를 풀게 됐다. 저녁을 먹으며 시작했던 술자리는 B의 집에서 2차로 이어졌다. A와 B는 어느 정도 술에 취하자 자연스럽게 스킨쉽을 나누기 시작했고 결국 성관계까지 하게됐다. 하지만 다음날 술이 깬 B는 A가 자신의 술 취한 상태를 이용하여 동의 없이 성관계를 맺었다며 화를 냈다. 평소 B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던 A는 오랜 친구이기도 한 B가 지난 밤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 채 무턱대고 항의를 하자 매우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일단 B를 진정시켜 사태를 수습하려는 마음에 거듭 사과를 하고 말았다. 이에 B는 A의 사과하는 내용이 담긴 메시지를 증거로 삼아 A를 준강간 혐의로 고소했고 A는 결국 기소됐다.
결국 잘못된 사과가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를 자인하는 증거가 되어 A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이처럼 성범죄 고소의 상당수는 낯선 자의 불의의 습격이 아니라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비롯되다 보니 당사자들이 인지하는 정황이 서로 다른 경우가 매우 많다.
더구나 평소 가까운 관계였을 경우 한쪽이 화를 내고 항의한다면 다른 한쪽은 일단 그 상황을 모면하려는 마음에 '뭐가 미안한진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무조건 미안한 것 같다'는 추상적인 내용의 사과부터 하게 되는 경우 역시 많다.
성범죄의 경우 이러한 어설픈 사과가 녹취나 메시지 캡쳐를 통해 기록으로 남겨져 유죄의 증거로 사용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은밀하게 이뤄지는 성범죄의 특성상 범죄 피해를 입증할 증거가 마땅치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고소를 결심하는 쪽에선 상대방의 사과를 유력한 증거로 내세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명백한 성범죄의 경우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진심어린 사과부터 최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하지만 이 사건처럼 피해자가 술에 취한 나머지 성관계 당시를 기억하지 못해 강간으로 오해하는 경우, 섣부른 사과는 가해자에게 무고한 혐의를 씌우는 것은 물론 도리어 피해자에게도 자신이 강간 피해자라는 지워지기 힘든 상처만 남기게 된다.
따라서 성관계 상대방의 블랙아웃으로 인한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면 무조건적인 사과를 연발하기 보다는, 혼란스럽고 당황했을 상대방의 얘기를 인내심을 갖고 들어주며 침착하고 차분하게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상대방이 고소를 강행할 것이 예상되는 경우, 법률전문가와 상담하면서 법적 대응 역시 미리 준비해나가는 것이 불필요한 고난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다.
A 사건의 경우, A의 사과가 정황상 B를 달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을 뿐 강간 행위를 자인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설명했다. 또 준강간 및 강간미수 혐의로 기소된 유사한 사건에서 판례가 "피해자가 만취해 피해 당시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피고인이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해 피해자를 간음했다고 볼 수 없다"며 "피해자는 의식이 있을 때 한 일을 나중에 기억하지 못하는 일시적 기억상실증인 '블랙아웃(black out)' 증상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이유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 예를 제시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한 결과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