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약과 국제적 강행규범 충돌시 '조약은 무효'

2019-08-07 11:41:39 게재

116개국 가입한 '비엔나 협약' 명시 … 강제징용은 반인도 범죄·노예노동 금지 위반

신우정 청주지방법원 부장판사(사법연수원 29기)는 '일본 아베정권의 주장대로 강제징용에 대한 청구권 소멸 합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국제법상 무효'라고 주장해 주목된다.

신 판사의 주장은 두가지에 근거한다. '국제적 강행규범'과 '개인의 국제법 주체성'이다. 국제법상 최상위의 규범인 '국제적 강행규범'에 따르면, 일제의 강제징용은 반인도범죄와 노예금지에 해당돼 어떠한 합의가 있더라도 무효다. 1969년 우리나라와 일본을 비롯한 116개국이 가입한 국제조약인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은 조약이 국제적 강행규범과 충돌하는 경우 무효라고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강제징용 사죄하라'│3일 저녁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아베규탄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역사왜곡, 경제침략, 평화위협 아베정권 규탄 3차 촛불문화제'에서 참가자들이 촛불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한종찬 기자


또 국제연합(UN)이 2005년 12월 회원국 만장일치로 채택한 '피해자 구제권리 기본원칙 및 가이드라인'(일명 피해자 권리장전)에 따르면 개인은 국제인권법이나 국제인도법의 주체로서 그 위반을 이유로 상대방 국가뿐만 아니라 개인, 법인 등을 상대로도 직접 손해배상 청구권을 갖는다.

◆한국 '협정에 개인청구권 포함안돼' =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 제2조 1항은 '양 체약국은 ...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확인한다'고 규정했다.

이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입장이 다르다. 한국정부와 사법부는 일관되게 '1965년 협정은 민사적 채권채무관계의 정리이지, 불법행위에 따른 배상이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일본이 불법행위를 시인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1965년 박정희정부가 발간한 '한일회담백서'는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당사국이 아니어서 승전국이 향유하는 손해 및 고통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인정받지 못했다. 한.일간 청구권문제에는 배상청구를 포함시킬 수 없다"고 밝혔다.

2005년 노무현정부 민관공동위원회도 "군위반부, 강제동원 중 발생한 가혹행위 등 당시 일본정부.군이 관여한 불법행위는 청구권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도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반면 아베정부는 '청구권협정에 강제징용에 따른 피해보상 등 개인의 모든 청구권이 포함돼 이미 배상이 끝났다'는 주장이다.

◆"국제적 강행규범은 로마법에 뿌리" = 신 판사 논문이 주목되는 것은 아베정부 주장대로 하더라도 '국제법상 무효'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신 판사는 '노예금지나 반인도범죄 금지 등은 강제징용 당시에는 없었던 국제법 이론인데, 현재의 국제법 법리로 무효라고 판단하는 것은 억지 아닌가'란 반론을 던지고, 이를 반박했다.

그는 "국제적 강행규범이라는 용어 자체는 20세기 들어 비로소 사용됐으나, 그 개념은 국제법 분야에서 독창적으로 발명된 게 아니라, 로마법에서부터 그 뿌리를 두고 형성.발전돼온 개념"이라며 "국제적 강행규범의 변화.발전은 그 특성에 비추어 이미 존재하는 규범을 발견하고 공인하는 과정이지 사후에 새롭게 법을 발명하는 절차가 아니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따라서 국제적 강행규범 위반 여부를 다루는 법원은 국제재판소든 국내재판소든 재판시점을 기준으로 공인돼 있는 국제적 강행규범을 토대로 과거에 발생한 국제적 강행규범 위반행위를 재판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노예금지라는 강행규범은 이미 강제징용 당시 존재했으나, 그에 관한 공식적 발견과 승인이 현재 이루어진 상태라고 보는 것이 국제적 강행규범의 개념에 부합하는 해석이므로, 법원은 노예금지라는 현재 확립된 국제적 강행규범을 잣대로 삼아 강제징용 당시 그러한 위반행위가 있었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인청구권, 국가가 함부로 손못대 = 신 판사는 또 '우리가 일본과 청구권협정을 통해 일괄타결방식으로 징용청구권에 관한 소권도 모두 소멸시키기로 했는데 이제와서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약속 위반 아닌가'라는 반론도 제기하고 이에 답했다.

신 판사는 "청구권협정에도 불구하고 징용청구권의 소권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논리는 일견 선행행위인 청구권협정과 모순된다고 주장될 여지가 있다"면서도 "그러나 국제적 강행규범 위반의 최상위 규범성, 즉 어떤 국제규범보다도 우월한 효력이 부여되는 국제적 강행규범의 특성에 비추어 이같은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설령 소권 소멸합의가 무효라는 결론이 청구권협정에서 양국이 정한 일괄타결방식의 약속과 배치되는 측면이 있다고 볼 여지가 있더라도, 국제적 강행규범의 적용이 우선이기에 그 소권 소멸합의는 여전히 무효"라고 덧붙였다.

이어 신 판사는 "징용청구권과 같이 개인의 국제적 강행규범 위반에 따른 청구권만큼은 국가가 함부로 손댈 수 없다"고 강조했다.

◆강제징용은 국제적 강행규범 위반 = 강제징용이 국제적 강행규범 위반에 해당하는 지에 대해 한국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제까지 선고된 대법원 판결은 이를 명시했다. △이송 및 배치 과정은 일본 군인 및 경찰 등의 통제아래 이뤄졌고, 작업환경이나 근무여건은 극히 열악했던 사실 △피해자들이 머문 공동숙소의 식사 양이나 질은 현저히 부실했고, 숙소도 다다미 12개의 좁은 방에 10~12명이 함께 생활해 수용생활과 다름없었던 사실 △숙소주변은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 근무시간은 물론 휴일에도 헌병, 경찰 등에 의한 감시가 삼엄해 자유가 거의 없었고, 일부 피해자는 도망 시도가 발각돼 심한 구타와 식사 미제공 등 비인간적 탄압을 받았던 사실 △한반도에 있는 가족들과 서신교환도 사전검열에 의해 그 내용이 제한됐던 사실 등이 그것이다.

신 판사는 "이러한 움직일 수 없는 사실관계를 종합할 때, 피해자들이 입은 피해는 모두 일본의 불법 식민지배에 터잡은 불법 강제징용이 원인이고 .. 일본 정부와 긴밀한 범죄공통체를 이룬 일본 기업이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피해자들에게 자행한 침해의 정도로 비추어, 모두 반인도범죄 또는 노예금지와 관련한 국제적 강행규범 위반을 구성한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지적했다.

◆"국제사법재판소도 불리하지 않아" = 신 판사는 국제사법재판소(ICJ)에 가더라도 '우리가 불리할 게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 사건이 혹시 ICJ에 가더라도, ICJ 또한 국제적 강행규범이나 개인의 국제법 주체성에 어긋나는 소권 소멸합의의 문제점을 쉽사리 외면하지는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우리는 ICJ에서 그것을 파고들면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대법원 결론처럼 징용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기본 주장으로 하되, 설령 일본의 주장과 같이 협정대상이 맞고 소권 소멸합의가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 합의는 현재 무효이기 때문에 대법원 판단이 결론적으로 옳다는 주장을 예비적 주장으로 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물론 ICJ가 이 사건과 같은 민감한 사안에서 정치적.외교적 고려를 전혀 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라며 "(그렇더라도) 국제인권법의 발달과 함께 이루어지고 있는 개인의 국제법 주체성 인정이나 국제적 강행규범 이론의 심화.발전이라는 현 국제법의 흐름 등을 고려할 때 ICJ가 우리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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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호 기자 bh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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