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동의청원 1년 | ③ 시민사회 요구는

높은 문턱 고수해 좌절감만 … 청원 성립요건 대폭 낮춰야

2021-01-14 10:57:53 게재

실제 청원해 본 시민들 "링크 접속부터 힘들어 포기하기 일쑤"

시민사회 제도개선TF "국회-시민 소통하려면 효능감 높여야"

“법 제정을 위한 청원을 준비하는데 법 내용을 설명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국회 국민동의청원 사이트의 오류를 피해서 본인인증을 받고 동의 버튼을 누를 수 있는지 기술적인 문제를 설명하는 데 시간을 훨씬 많이 쏟은 것 같아요. 국회청원을 하는 것인지, 정보화교육을 하는 것인지 헛갈릴 정도였으니까요.”(이진희 장애여성공감 대표)

이진희 장애여성공감 대표가 지난 7일 서울 광화문 농성장에서 기자와 만나 국회 국민동의청원 캠페인을 벌이며 인증방법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만든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이 대표는 "청원링크에 접속하는 것부터 오류가 많았기 때문에 단계별로 어떻게 하면 오류가 가장 적은지 알아내 자세한 설명자료를 만들어야 했다"고 설명했다. 사진 김형선 기자


지난 해 7월 국회 국민동의청원 사이트에 한 시민이 포괄적 차별금지법 입법을 촉구하는 청원을 올렸다. 평등한 세상을 바라며 청원까지 올린 시민에게 응답하자는 생각에 110개 시민단체가 모인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이하 차제연)는 한 달 동안 국민동의청원 성립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차제연 활동을 하고 있는 이진희 대표도 열성적으로 캠페인을 벌인 사람 중 한 명이다. 지난 7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이 대표는 국민동의청원 이야기를 꺼내자 한숨부터 쉬었다. 국민들의 청원권을 보장하겠다고 만든 국민동의청원이 높은 문턱을 고수해 오히려 시민들에게 좌절감만 주고 있다는 것이 이 대표의 지적이다.

◆청원내용보다 인증방법 설명에 더 시간 투자해 = “청원에 동의하려면 휴대폰으로 인증을 하든지 국회 회원가입을 해야 하는데 그것부터가 벌써 장벽이었어요. 회원가입을 하려고 해도 휴대폰 인증을 받아야 하니까 결론적으로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은 참여를 할 수 없다는 뜻이잖아요.”

스마트폰이 있다 해도 아이폰이냐 안드로이드폰이냐에 따라 설정을 바꿔줘야 청원링크에 접속할 수 있는가 하면, 페이스북이나 텔레그램같은 SNS를 통해 전달받은 링크로 들어가면 추가적인 절차를 거쳐야 해서 스마트폰 조작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두손 들고 포기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시각장애인이나 발달장애인은 더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장애인들의 어려움을 접한 이 대표는 일부 발달장애인 회원들과 청원 참여를 도와주는 오프라인 모임을 열기도 했다고 한다.

국민동의청원 참여를 하고 싶어도 방법이 까다로워 어려움을 겪는 발달장애인들은 비장애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사진은 지난해 모임을 열고 국민동의청원 참여 방법을 안내받은 발달장애인들. 사진 제공 장애여성공감


“발달장애인들은 디지털기기 조작 등의 문제로 청원 참여를 하려면 주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개인정보를 노출해야하는 문제도 있어요. 이런 과정을 겪으며 과연 국회가 국민동의청원을 만든 취지가 정말 국민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선지 회의가 들었죠. 국회가 '기술적인 어려움은 국민들 당신들이 알아서 잘 극복해 봐라' 이런 생각으로 국민동의청원 사이트를 연 것은 아닐 텐데 말이죠.”

결국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청원은 2만5123명의 동의를 받아 국회 논의 요건인 10만명에 미달했다. 이 대표는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니 너희들이 제시한 의제는 중요 의제가 아니다라는 낙인 찍히는 느낌이 들었다”면서 “그런데 과연 2만5123명이 동의한 의제는 국회에서 전혀 다뤄지지 않아도 되는 가벼운 무게인가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니지 않느냐. 다수의 지지를 받느냐 못 받느냐로 의제의 순위를 정하는 데 대해 국회가 먼저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0만명 조건 달성해도 농성 등 뒤따르지 않으면 제대로 논의 안 돼 = 국회 국민동의청원제도 도입 후 1년을 지켜본 시민사회는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고 보고 제도개선 활동에 돌입했다. 지난해 말 4.16연대, 참여연대 등이 참여한 국민동의청원제도개선TF가 구성돼 그동안 느낀 문제점을 공론화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지금 제도로는 헌법제26조(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기관에 문서로 청원할 권리를 가진다)가 보장하는 청원권 행사가 어렵다고 봤기 때문이다.

4.16연대는 국민동의청원을 올려서 10만명 조건도 달성해 봤지만 국회에선 찬밥 신세로 전락하는 걸 본 이후에 제도개선TF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중이다. 4.16연대는 지난해 10월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사회적 참사의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 개정에 관한 청원' '4.16세월호참사 관련 박근혜 전 대통령 기록물 공개 결의에 관한 청원'을 올렸고 각각 10만명의 동의를 얻었다. 청원 성립 요건을 넘기고서도 유가족들이 국회 앞에서 노숙 농성을 하며 목이 터지도록 외친 후에야 가까스로 특별법 개정안이 처리됐다. 기록물 공개에 대한 청원은 아예 논의조차 안 되고 있다.

김동희 4.16연대 활동가는 13일 내일신문과 통화에서 "국민 10만명의 동의를 받더라도 노숙 농성이나 단식같은 제도 밖 투쟁이 뒤따르지 않으면 해당 청원은 몇 달이고 국회에서 마냥 계류되는 것이 현실"이라면서 "여러 투쟁을 통해 국회에서 논의되더라도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여러 법안에 병합돼서 논의되는 게 보통이기 때문에 청원 내용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국회 운영상 청원 원안을 모두 반영할 수 없다 하더라도 청원인이 주장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전달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현 제도상으로는 그런 절차도 제대로 보장되어 있지 않다. 국회청원심사규칙에 따르면 필요한 경우에 한해 청원인의 진술을 듣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90일 이내 5만 명 이상 동의'로 문턱 낮춰야 = 김 활동가는 "국민동의청원 성립 요건의 문턱을 낮추는 게 급선무"라면서 "최소한 90일 이내 5만 명 이상의 국민 동의를 받으면 청원이 성립되도록 요건을 대폭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은 4주간 5만명 동의 시에 청원위원회 공개회의에서 의무적으로 논의하도록 하고 있고, 영국은 기간 제한 없이 10만 명 이상 동의하면 자동으로 본회의에 상정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애초에 국회에서도 처음 국민동의청원 성립요건에 대해 논의했을 때 국회의장 직속 국회혁신자문위원회의 제안에 따라 '30일 이내에 20명 이상의 국민 찬성을 받아 공개하고, 공개 후 90일 이내 5만 명 이상의 국민 동의를 받을 경우'라는 요건을 제안한 바 있다.

제도개선TF에 참여중인 참여연대도 △청원 성립요건 대폭 완화(국회혁신자문위원회 원안대로) △모든 청원인의 진술권 보장 △청원 심사 무기한 연장을 조장하는 국회법 규정(제59조의 2, 제125조 6항) 삭제 △청원참여 과정 오류발생시 대처할 전담인력 배치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민선영 참여연대 간사는 "모든 청원인의 진술권 보장이나 청원 성립요건 완화 등은 국회청원심사규칙 개정만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법령 개정보다 훨씬 간단하게 실현이 가능하다"면서 "국민동의청원을 통해 제안된 내용이 제대로 국회를 통해 응답이 된다면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감도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동의청원 1년" 연재기사]

김형선 기자 egoh@naeil.com
김형선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