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에너지패권, 원자력도 예외 아냐

2022-06-13 11:06:19 게재

포린어페어스 "전세계 핵발전도 러시아에 의존 … 신뢰의 동맹끼리 공급망 구축해야"

우크라이나 사태로 전세계가 에너지 위기를 겪고 있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은 2월 말 이래 국제유가는 25% 이상, 가스가격은 2배 가까이 올랐다. 향후 가스와 원유 시장전망도 어둡다. 러시아가 석유와 가스 수출로 전비를 대는 것을 막기 위해 서구 국가들이 러시아에 각종 제재를 가하면서, 에너지 가격은 한동안 고공상태를 유지하며 계속 변동성을 키울 전망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불확실성으로 각국의 기후변화 정책이 후퇴할 것이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는 최근 "많은 나라들이 에너지 비용을 낮추고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면서도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원자력에너지에 다시 눈을 돌리고 있다"고 전했다.

이유는 분명하다. 원자력은 탄소배출이 없는 에너지 중 하나다. 원자력이 유럽연합(EU) 전력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5%다. 태양광과 풍력 등 대부분의 신재생에너지와 달리, 원자력은 연중 일정하게 대규모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 유럽은 러시아 천연가스 등 화석연료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원자력에너지 증대를 꾀하고 있다.
러시아 트베리주 북서부 우도믈랴에 위치한 칼리닌스카야 원자력발전소. 사진출처:위키미디어커먼스


하지만 유럽의 원자력 증대는 단기적으로 러시아 의존도를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는 지적이다. 유럽이 러시아 원유와 가스에 의존하게 된 것처럼, 전세계는 원자력을 만드는 데 필요한 원자재에 있어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린어페어스는 "러시아는 원자력 우라늄 농축에서 전세계 용량의 절반을 차지한다. 또 유럽에서 생산되는 원자력에너지의 40%는 러시아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에 의존한다. 뒤의 두 국가는 러시아와 친밀한 동맹"이라고 전했다.

미국 원자력발전의 절반(미국 총 전력생산의 10%) 역시 3개국에서 수입한 원료로 구동된다. 때문에 미국 원자력업계는 러시아 에너지 수입과 관련한 제재에서 우라늄을 제외시켜 달라고 정부에 로비를 펴기도 했다. 러시아는 또 원자력발전 수출시장과 원자로 건설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특히 신흥국에서 비중이 높다. 러시아에 가장 근접한 경쟁국은 중국이다. 러시아나 중국과 원자력발전을 계약한 국가들은 향후 수십년 동안 핵원료와 사후 서비스 등에서 두 나라에 계속 의존해야 한다.

러시아의 원자력 파워

지난 20년 동안 러시아는 전세계가 즐겨찾는 원자력 공급국으로 활약했다. 특히 원자력발전소를 처음 짓는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이 크다.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러시아의 경험은 풍부하다. 원자로와 연료, 건설금융, 심지어 원자력 노동자 교육까지 원자력발전과 관련한 모든 아이템들을 갖고 있다. 2000년 이후 러시아와 원자력 협력각서에 서명한 나라는 모두 47개국에 달한다. 러시아는 현재 방글라데시와 벨라루스, 터키 등에 거대한 원자력발전소를 건설중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중동, 중남미 등에서 진행되는 원자력발전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있다.

러시아는 동유럽의 원자력발전 프로젝트에도 관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지난 수십년 러시아 주요 고객 중 하나였다. 러시아에서 핵연료 95%를 수입했다. 그러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면서 우크라이나는 우라늄 수입원을 다각화하기 시작했다.

올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 침공 이후 서구 국가들은 러시아 원자력 의존도를 우려하고 있다. 러시아 에너지 원천에서 독립하기 위해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지난달 2일(현지시각) 핀란드는 러시아와 계약한 1200메가와트(MW) 원자로 건설 컨소시엄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물론 유럽이 러시아에 가장 크게 의존하는 건 원자력이라기보다 석탄과 석유 가스 등 화석연료다. 때문에 국제에너지기구(IEA)는 러시아 에너지 의존을 탈피하는 가장 좋은 대안으로 원자력을 제시한 바 있다. IEA는 "원자력은 EU에서 탄소배출이 적은 가장 큰 전력원"이라며 "원자력 확산으로 유럽대륙은 화석연료 없는 에너지 접근성을 크게 늘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IEA 입장에 모두가 동의하는 건 아니다. EU위원회는 러시아 가스 수입을 대폭 줄일 계획이지만 원자력을 대안으로 거론하지는 않는다. 독일 역시 남은 3개의 원자로를 올해 말까지 폐쇄할 계획이다.

반면 벨기에나 일본 등은 러시아 가스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원자력에 대거 투자할 방침이다. 에너지 독립성을 높이기 위해 이들 국가는 원자력을 이용하던 전통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석탄공급이 줄어가던 영국이나 일본 등은 2차세계대전 이후 산업 발전수요를 대기 위해 원자력에 눈을 돌렸다. 프랑스와 스웨덴 역시 1970년대 석유 엠바고 이후 중동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원자력 인프라를 대거 구축했다.

유럽이 러시아 천연가스에서 벗어나는 데 원자력이 주요 역할을 담당할 수 있지만, 원자력 역시 러시아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다. 게다가 여러 국가들이 러시아와 협약한 원자력 프로젝트를 취소한다고 해도, 프랑스를 추월해 곧 글로벌 2대 원자력 생산국가가 될 중국이 그 과실을 고스란히 가져갈 수 있다. 중국은 글로벌 원자력 시장을 지배할 야심을 감추지 않고 있다.

하지만 거의 모든 녹색에너지 원천엔 윤리적 딜레마가 있다. 콩고민주공화국은 전세계 코발트의 60%를 생산한다. 전기차 제조에 중요한 광물이다. 하지만 콩고 생산기업들은 아동노동 착취 등과 관련해 국제적인 지탄을 받는다. 미국 바이든행정부는 2021년 중국 태양광 기업 여러곳을 제재리스트에 올렸다. 강제노동 등 혐의를 적용했다. 러시아는 전기차 배터리에 쓰이는 니켈의 주요 생산국가다. 러시아산 니켈에 대한 제재 가능성 때문에 한때 니켈 가격은 11년래 최고치에 오르기도 했다.

원자력 산업정책 필요

러시아 에너지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려면 전세계는 에너지 공급망을 윤리적이고 지속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에너지 고립주의로 복귀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현대 에너지 생산시스템은 복잡하고 상호연관적이다. 특히 주요 광물은 전세계에 골고루 분포돼 있지 않다.

포린어페어스는 "이는 한 국가가 전적으로 에너지 독립을 달성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한다"며 "믿을 수 있는 국가들끼리 에너지 상호의존성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둬야 한다"고 지적했다.

원자력에너지와 관련해 이미 이런 과정이 진행중이다. 루마니아는 2020년 중국 국영기업과 맺은 2기의 원자로 건설 계약을 취소했다. 대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과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체코공화국 원자력 사업에 입찰하기 위해 경쟁했다. 하지만 체코정부는 이 두 나라를 배제했다.

중국 기업들은 영국 원자력발전 프로젝트 2곳에 투자했다. 하지만 영국정부는 2021년 9월 그중 1곳의 프로젝트에서 중국광핵그룹의 지분을 강제매각토록 하겠다고 밝혔다. 빌 게이츠가 공동창업한 미국 원자력기업은 2019년 중국에 실험 원자로를 구축하는 프로젝트를 취소했다고 밝혔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에 대해 무역제재를 추가하면서다.

하지만 서구 원자력산업은 최근 수년 동안 멈춘 상태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유럽 원자력기업들은 러시아와 중국 국영기업에 대항할 적합한 대안처를 찾는 데 고전하고 있다. 결국 러시아와 중국을 따라잡기 위해선 서구국가들도 산업정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원자력 공급망과 함께 자국의 제조업 능력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

물론 이는 쉽지 않은 과제다. 비용도 만만치 않다. 전통의 대규모 원자력 프로젝트에선 미국과 유럽이 고전하고 있지만 새로운 기술의 소규모 원자력 기술에선 시장을 선도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의 경우 최신 원자로 기술을 연구하는 기업이 뉴스케일파워를 비롯해 60곳을 넘는다. 뉴스케일파워는 '소형모듈식원자로'(SMR)를 개발해 시장에 내놓았다. 폴란드와 루마니아가 이를 배치하는 데 합의했다. 루마니아는 캐나다에서도 원자로를 수입할 계획이다.

영국 기업 롤스로이스는 자체적으로 SMR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 최대 유틸리티 지주회사 엑셀론, 체코 기업들과 양해각서에 서명했다. 2014년 이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원자력 의존을 극복하도록 도운 미국 원자력에너지기업 웨스팅하우스는 최근 체코공화국, 슬로베니아와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새로 개발한 'AP1000원자로'를 배치하는 방안을 찾고 있다. 한편 미국 국무부는 지난 4월 라트비아의 원자력발전 프로젝트 실현가능성을 협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포린어페어스는 "동맹 간 원자력 협력은 안전하고 윤리적이며 지속가능한 에너지 공급망을 창출하는 데 필수적"이라며 "이를 통해 화석연료에서 벗어나 공급부족, 가격충격을 피할 수 있다"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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