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현의 기후행동
낙엽에 숨겨진 '빈익빈 부익부'
온 산야를 울긋불긋 물들이던 단풍이 낙엽으로 변해 지면을 가득 덮으며 나무줄기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봄철 신록으로 시작해 한여름 짙은 녹색의 잎을 통해 열심히 광합성을 하던 나무들이 잎을 떨구고 휴식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시인의 시선으로 보면 단풍은 안식의 시간을 자축하는 나무들의 향연이다. 하지만 과학자 시각으로 살펴보면 낙엽이 지는 것은 나무가 겨울의 쉼을 맞이하기 전에 먼저 내년 봄을 준비하는 치열한 몸짓이다.
단풍은 나뭇잎에서 광합성에 필수요소인 엽록소가 줄기로 이동하면서 녹색이 사라지고 남은 색소들이 어우러진 모습이다. 낮의 길이가 짧아지고 기온이 떨어지면 나무는 더 이상 생장을 위한 광합성 활동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겨울잠을 준비한다. 광합성 공장이던 잎에서 진행한 생산활동을 접고 내년을 기약하는 것이다. 다만 공장을 폐업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쉬었다가 내년에 재개할 것이기에 각종 자재를 공장에서 빼내 창고인 줄기로 이동시킨다. 엽록소를 비롯해 각종 영양소를 잎에서 줄기로 옮기는 작업을 하는데, 이를 학술적인 용어로 체내전이(體內轉移)라고 부른다.
낙엽으로 파생되는 '빈익빈 부익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체내전이를 하는 모습은 나무가 자라는 여건에 따라 다르다. 토양 비옥도에 따라 알뜰한 삶을 꾸리려고 시도하거나 풍족함 속에 여유를 부리기도 한다. 토양에 양분이 적어 알뜰하게 살아야 하는 나무는 잎에 있는 양분을 최대한 줄기로 옮기므로 낙엽에는 영양소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반면 영양분이 많은 비옥한 토양에서 자라는 나무는 충분히 영양소를 공급받을 수 있으므로 체내전이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잎에 일정한 수준의 영양분이 남아있는 상태로 낙엽을 떨군다.
그런데 다소 다른 모습으로 지면에 도달한 낙엽은 전혀 다른 대우를 받게 된다. 양분을 지닌 낙엽은 토양에 사는 미생물에게 환영받으며 쉽게 분해되지만, 양분이 거의 없는 낙엽은 토양미생물이 홀대하며 버림을 받아 잘 썩지 않고 토양에 섞이지 못하는 상황이 전개된다. 원래 비옥했던 토양은 낙엽이 잘 썩어 토양유기물이 풍부해지면서 더 비옥하게 되고, 그렇지 않아도 척박했던 토양은 낙엽조차 썩지 않아 더 척박해진다. 단풍의 자태를 뽐내던 낙엽이 지면에 어떤 모습으로 들어오느냐에 따라 토양생태계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난다.
선순환구조를 지닌 부익부(富益富) 생태계는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빈익빈(貧益貧)의 악순환 상황에 있는 나무를 구제할 방법은 없을까? 가장 쉬운 해결책은 비옥도가 낮은 가난한 토양에 양분을 공급하는 것이다. 비료를 주면서 충분한 양분을 공급하면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다. 그런데 비료를 얼마나 주어야 할까? 매년 나무가 필요로 하는 양을 공급해야 하는데, 1~2년간 비료를 주고 멈추면 그 나무는 다시 궁핍함을 느낀다. 나무는 자신이 자라는 토양에 양분이 충분하다고 느끼기 전까지는 알뜰한 체내전이 과정을 계속하며 낙엽을 떨군다. 선순환구조를 만들려면, 최소한 3년 이상 비료를 공급하며 나무가 여유로움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연이 가르쳐주는 지혜는 우리의 삶에도 적용될 수 있다. 기업이나 개인의 회생을 도와 자생력을 지닌 선순환 체제를 만들려면, 일시적인 투자가 아니라 일정한 수준 이상의 지속적인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 나무가 자라는 토양생태계가 선순환구조를 이루었는지 확인하려면 비료를 잔뜩 받은 토양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체내전이 후의 낙엽에 양분이 충분히 남아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투자가 얼마나 이루어졌는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투자 효과가 회복력과 지속성이 유지되는가를 살펴야 한다.
기후위기 대응도 선순환 구조로 만들어야
기후위기라고 표현하며 기후변화에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전세계가 산업혁명 이전 시기 대비 기온이 1.5℃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막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생력을 지닌 선순환구조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낙엽이 가르쳐주는 지혜처럼, 악순환 구조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중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낙엽의 정취를 느끼며 올해의 각종 정책과 투자가 보여주기식 처방이 아니었는지 검토해야 한다.
선순환구조가 제대로 구축될 수 있도록 실효성을 제대로 점검하고, 끈기와 인내심을 갖고 투자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