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스위스 은행 '비밀유지' 신화 깨지나

2023-04-20 12:30:18 게재
스위스 은행들이 오랜기간 지켜온 비밀주의가 붕괴될지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프랑스혁명 당시 분노한 민중의 공격을 피해 도망치던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를 끝까지 지키다 모두 숨진 스위스 용병처럼 절대 배신하지 않고 비밀을 지키는 신뢰의 상징인 스위스 은행들의 비밀주의 신화가 크레디트스위스(CS) 은행의 파산으로 또다시 위기에 봉착했다.

167년의 역사를 지닌 스위스 제2위 은행이자 거대 글로벌 투자은행(IB)인 CS는 세계 부자들의 금고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지난 3월 유동성 위기로 뱅크런이 발생하자 스위스 당국은 강제로 라이벌 은행인 스위스연방은행(UBS)에 인수 합병시켰다.

스위스 은행들은 철저한 비밀보호로 '검은돈'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이익을 챙기는 영업을 해왔다. 마약 딜러나 테러리스트는 물론이고 심지어 히틀러 등 독재자의 예금까지 받아가면서 철통같이 비밀을 지켰다. 인구 900만명도 안되는 유럽의 작은 나라 스위스가 오늘날과 같은 강소국이 된 이유중 하나다.

크레디트스위스은행 파산으로 '비밀주의 신화' 휘청

스위스 비밀계좌의 역사는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주변국과 전쟁을 치르는 데 돈이 필요했던 프랑스는 스위스 은행에 손을 내밀었다. 그때 스위스 은행에는 프랑스 왕족들의 박해를 피해 스위스로 이주한 프랑스 신교도들이 대거 관여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자신들이 쫓아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계면쩍었는지 돈을 빌린 사실을 비밀로 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스위스 은행의 비밀주의가 시작됐다.

그후 스위스 은행은 철저한 비밀보호를 바탕으로 영업을 해오면서 안전한 재산도피처로서 신뢰를 쌓았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유럽 각국이 전비 조달을 위해 세금을 크게 올리자 부자들의 과세회피를 위한 거금이 스위스 은행으로 대거 몰려들기도 했다.

1934년에는 스위스 당국이 직접 나서 고객 동의없이 계좌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하지 못하도록 하고 이를 어길 경우 처벌하는 법까지 만들었다. 제2차세계대전 직후 승리한 연합국이 스위스 은행에 예치된 나치 자산을 몰수하려 했으나 이 법을 근거로 한 스위스 은행들의 거부로 실패했다.

하지만 이런 비밀보장 관행은 세계화로 각국의 금융산업이 개방되면서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미국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던 2008년, 미국에서 자금을 빼내 스위스 은행의 비밀금고에 넣는 행위를 근절해야 금융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 스위스 은행의 비밀유지 관행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2009년에는 미국인의 돈세탁에 협조했다며 스위스 1위 은행인 UBS에 약 8억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스위스정부도 자국민의 계좌와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라는 요구가 세계 각국으로부터 쇄도하자 비밀계좌를 보호해 주던 연방법 규정을 삭제했다.

그런데도 스위스 은행들은 고객정보를 쉽게 노출시키지 않는 전략을 취해왔다. 이들은 직원들조차도 예금주의 신원을 알 수 없도록 입·출금 등 각종 거래를 할 때 이름을 쓰지 않고 코드번호를 사용한다. 비밀계좌의 잔액과 거래내역도 직원 중 극히 일부만 열람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스위스는 세계조세정의네트워크가 매년 발표하는 금융비밀지수에서 지난해 미국에 이어 2위에 오를 정도로 여전히 예금주의 비밀을 가장 잘 지켜주는 나라에 속한다.

외국인 예금 3300조원 중 절반이 부정축재자 재산으로 추정

스위스 은행들의 비밀금고에 쌓인 외국인 예금은 2021년 기준, 3300조원이 넘는다. 우리나라 올해 예산의 다섯배 이상으로 전 세계은행들이 보유한 외국인 예금의 1/4이 넘는 막대한 규모다.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은 세계 각국의 부정축재자 자산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2월 미국 뉴욕타임스(NYT)와 영국 가디언을 비롯한 세계 46개 언론사는 공동취재를 통해 "CS가 세계 각국의 독재자를 비롯해 살인교사 인신매매 마약밀매 돈세탁 등 중범죄에 연루된 고객 3만명으로부터 1000억스위스프랑(약 141조4930억원)을 예탁받아 보호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하지만 CS 파산으로 스위스 은행의 신뢰에 금이 갔다. UBS의 CS 인수로 160억스위스프량(약 22조원)의 신종자본증권(AT1) 채권이 휴지조각이 되는 등 전세계 부자들의 안전금고로 여겨졌던 스위스 은행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부각됐다. 스위스 은행 비밀유지 신화의 종착역이 과연 어디가 될지 자못 궁금하다.
박현채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