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재계 반발에 ‘소액주주 보호’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범위 좁혀
기업 합병·분할 등에 국한 … “상법 개정 부작용 해소하며 실효적 주주보호”
더불어민주당,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 의무’ 명시한 상법 개정안 추진
소액주주 보호를 위한 상법 개정 추진에 재계의 반발이 커지면서 정부가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범위를 좁혀 법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특히 상법 개정의 부작용을 거론하며 상장법인의 합병·분할 등에 국한해 제한적으로 소액주주 보호에 나서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올해 초 윤석열 대통령은 소액주주 보호를 위한 상법 개정 추진을 밝혔고,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도 상법 개정 필요성을 여러 차례 언급한바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 등을 상법에 규정하는 개정안을 발의한 가운데 정부는 상법 개정에 사실상 반대하는 입장을 정했다.
2일 오전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정부서울청사에서 구상엽 법무부 법무실장, 이세훈 금융감독원 수석부원장과 함께 ‘일반주주 이익보호 강화를 위한 자본시장법 개정방향’을 발표했다.
김 위원장은 “상법은 회사 전체에 적용되는 일반법이므로 일반법 개정은 법리적 측면과 법개정이 미칠 영향을 심도 있게, 진중하게 논의해야 할 사안”이라며 “특히 좋은 취지와 선의로 법률이 개정되더라도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이 크게 나타날 경우 제도개선의 의미는 훼손될 수밖에 없고, 우리는 그러한 경우를 드물지 않게 목격해 왔다”고 밝혔다.
그는 “이런 점 등을 감안해 일반주주 보호를 위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대안으로 국회에서 보다 집중적으로 논의되기를 바라며, 정부도 적극적으로 논의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SK·현대자동차 등 주요 기업 사장 16명은 지난달 21일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 등을 명시한 상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많은 기업들은 소송 남발과 해외 투기자본의 공격에 시달려 이사회의 정상적인 운영이 어려워지고, 신성장동력 발굴에도 상당한 애로를 겪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앞서 지난달 15일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상법 개정은 지극히 당연한 이사의 주주 보호의무를 현실화시키고, 해외 장기투자 자금의 한국 시장 진입의 기초가 돼 국내 기업의 경쟁력을 크게 향상시키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법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정부는 이번 자본시장법 개정 방향이 재계에서도 수용가능한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입장이다.
◆상장법인 합병시 이사회 공시 의무 = 정부가 내놓은 자본시장법 개정방향을 보면 주주에 대한 이사의 의무는 상장법인 합병 등의 경우에 적용된다. 상장법인이 합병 등을 하는 경우 이사회는 합병 등의 목적, 기대효과, 가액의 적정성 등에 대한 의견서를 작성·공시하는 등 주주의 정당한 이익이 보호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자본시장법 개정안에 명시하겠다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합병, 중요한 영업·자산의 양수도, 주식의 포괄적 교환·이전, 분할·분할합병 등이다. 정부는 추후 이사회 의견서 작성·공시를 포함한 주주 보호 노력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제정해 경영진의 행동규범을 구체화하겠다는 계획이다.
김 위원장은 “이사회가 주주의 정당한 이익을 보호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절차적 성격의 규정을 신설함으로써 절차 준수시 거래의 적법성과 이사의 면책이 보장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는 상법상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회사와 주주를 병기하는 실체적 의무 규정에 비해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효과도 기대된다”고 밝혔다.
그는 “손익거래의 경우 거의 대부분 회사와 주주의 이해가 일치하는 반면, 합병과 분할 등 재무적 거래의 경우 회사와 주주 또는 대주주와 일반주주간 이해상충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고 실제 일반 주주 보호 문제도 재무적 거래에서 다수 발생하고 있다”며 “자본시장법에 재무적 거래에 대해 주주보호 노력 조항을 둠으로써 상법 개정의 부작용을 해소하면서 실효적인 주주보호가 가능하다고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개정방향에는 기업 합병 등에 있어 합병가액 산정 기준을 전면 폐지하는 내용도 담겼다. 최근 정부는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으로 비계열사간 합병의 경우 합병가액 산식을 적용하는 대상에서 제외했다. 정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열사간 합병에 대해서도 산정기준을 적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상장법인이 합병 등을 하는 경우 주식가격, 자산가치, 수익가치 등 다양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산정된 공정한 가액으로 결정하도록 규정하고, 합병 등의 가액이 일률적인 산식에서 벗어나 기업의 실질가치를 반영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또 원칙적으로 모든 합병 등에 대해 외부평가기관에 의한 평가·공시를 의무화하기로 했다. 현재는 상장 계열사간 합병 등에 있어서는 외부평가·공시가 선택사항이다.
◆물적분할, 모회사 일반주주에 공모신주 우선배정 = 상장기업의 물적분할로 인한 일반주주의 피해가 이어지면서 분할된 자회사 상장시 공모신주를 모기업 일반주주(대주주 제외)에게 우선 배정하는 내용도 이번 개정방향에 포함됐다. LG화학-LG에너지솔루션, SK케미칼-SK바이오사이언스 등 핵심 사업이 물적분할되는 경우 주가 하락으로 일반 주주들이 피해를 입었다.
정부는 공모신주 중 20% 범위 내에서 모기업 일반주주에게 우선배정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로 했다. 금융위는 “모회사 일반주주에게 물적분할 후 상장된 유망 사업부문의 가치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지난달 29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물적분할 후 자회사 상장시 일반주주에게 공모신주의 25% 이상을 우선 배정하는 내용의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정부는 또 한국거래소 세칙 개정을 통해 물적분할 후 자회사를 상장하는 경우 거래소가 일반주주 보호노력을 심사하는 기간 제한(5년)을 삭제하기로 했다. 거래소는 물적분할을 우회할 수 있는 영업양도·현물출자 방식 등의 기업 분할 형태에 대해서도 동일한 수준의 질적 심사를 실시하고 있다. 금융위는 “기간 제한 없이 상장기업이 모회사 일반주주에 대해 충분한 보호노력을 이행하도록 유도하겠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여당과 협의해 의원 입법으로 이번주 빠른 시일 내에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