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중립 실전편 8
4차 배출권계획, 에너지정책과 연계성 높여야 성공
유상할당 확대와 함께 탄소가격이 제대로 반영돼야 … "배출권은 기업의 무형자산, 시장 자율성 보장"
'제4차 배출권거래제 기본계획' 수립을 법정 기한인 내년보다 한 해 앞당겨 올해 안에 마무리하겠다는 게 정부 방침이다. 시장 불확실성을 줄이고 온실가스 배출량 제어를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다. 온실가스배출권 거래제는 국가 온실가스 배출의 약 73%를 커버할 정도로 중요한 탄소 감축 수단이다. 지금까지는 초기 제도 안정화를 위해 배출권을 무상으로 업체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졌지만 이제는 다르다.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탈탄소경제로 전환 시기를 최대한 앞당겨야 하는 만큼 제대로 된 탄소가격이 시장에 반영되는 체제로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에너지정책과 연계 강화는 필수다.
탄소중립 시대에 걸맞게 '제4차 배출권거래제 기본계획'(2026~2030년) 수립 시 에너지정책과 연계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비용 대비 효과적으로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 제대로 된 탄소가격체계가 배출권거래제에 반영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1일 이상엽 한국환경연구원(KEI) 탄소중립연구실 선임연구위원은 "제4차 배출권거래제 기본계획의 경우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 수립 이후 탄소중립 시대에 접어드는 시기에 첫번째로 수립되는 배출권 계획인 만큼 중요하다"며 "에너지전환시대에 걸맞은 배출권거래제가 될 수 있도록 에너지정책과의 연계성을 강화하는 방안을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배출권거래제는 국가 온실가스 배출의 약 73%를 관리하는 중요한 제도다. 배출권거래제를 시행 중인 다른 국가들에 비해 커버리지 측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유럽연합(EU) 영국 독일 등은 20~40%대다.
◆전력시장 가격 체계에 탄소비용 반영 = 7월 31일 유승직 숙명여대 기후환경융합학과 교수는 "배출권 유상할당 비중이 10%라고 하는데 전체 할당 대상 업체 중 비중으로 따지면 3%대에 불과하다"며 "유상할당 비중 확대 속도를 앞당기면서 전기요금이 제대로 반영되는 구조를 함께 가져가는 걸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지난해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보면 산업 부문은 줄고 건물과 수송 부문이 늘었다"며 "건물 부문에서 전기를 많이 사용하는데 제대로 된 에너지 원가가 요금에 반영되지 않으면 유상할당을 늘려도 효율성이 높지 않을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환경부 온실가스종합정보센터가 지난달 25일 공개한 '2022년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 잠정치'에 따르면 건물 부문에서 뿜어낸 온실가스 양은 4830만톤이다. 이는 2021년 4690만톤에 비해 3.0% 증가한 수치다. 건물이나 수송 부문은 배출권거래제 커버리지(부문별 총 목표배출량에서 배출권 총량이 차지하는 비중)가 낮은 편이라 보완책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배출권거래제 도입 초기 제도 안착을 위해서 배출권 전량을 무상으로 기업들에게 줬다. 이후 단계별로 기업에 할당된 배출권을 정부가 경매 방식을 통해 판매하는 유상할당 비율을 높이고 있지만 10%에 불과한 수준이다. 정부가 무료 배출권을 지나치게 많이 풀면 시장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기 힘들다.
국제 협력 포럼인 ICAP(International Carbon Action Partnership)의 보고서에 따르면 EU의 유상할당 비중은 57%다. 독일 100%, 뉴질랜드 56% 등이다. 반면 우리나라 배출권거래제는 국가배출의 70%를 차지하는 데도 유상할당 비중이 턱없이 낮다. 배출권을 통한 감축 비율이 국가 전체 감축량의 70%보다 훨씬 아래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선임연구위원은 "발전 등 전환부문에서 온실가스 감축을 할 때 의무만 부여되고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작동 안 되면 문제"라며 "배출권거래제가 발전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전기요금 원가주의 원칙 확립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탄소 비용이 충분하게 반영되지 못하는 현 전력시장 가격체계 하에서는 각 부문의 전력화가 전환부문으로 감축 부담과 책임을 전가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탄중위 민간위원들 "합리적 에너지 요금체계 구축" = 지난 4월 2050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민간위원들도 "저탄소 사회로의 성공적인 전환을 위해 추진해야 할 과제들은 상당 부분 서로 맞물려 있고, 수요 효율화 혁신과 함께 시장원리에 기반한 합리적 에너지 요금 체계를 구축해야 온실가스 감축 실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취지의 입장문을 낸 바 있다.
초기 배출권거래제 설계 당시 유럽 등과 달리 우리나라 전기료는 원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제도 도입을 해도 전기 사용을 억제할 수 있는 기능이 약했다. 해외와 달리 간접배출을 배출권거래제에 넣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간접배출이란 다른 사람으로부터 공급된 전기 또는 열을 사용하면서 나오는 온실가스 양을 말한다. 게다가 주요국 배출권거래제 시장은 대부분 전력·에너지시장 자유화를 기반으로 운영된다. 경매 비중도 높아 배출권비용 상승에 따른 시장 가격 전가가 가능한 상황이다.
배출권거래제 가격 급등락이나 시장 활성화 문제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배출권거래제는 기본적으로 기업들이 온실가스를 줄일 수 있도록 투자를 유도하는 제도다.
배출권 가격이 지나치게 낮게 형성되면 기업들은 당연히 시설 개선 등을 통한 온실가스 감축 프로젝트를 진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온실가스 추가 감축 비용이 배출권 가격보다 낮아야 직접 감축에 투자가 이뤄진다.
최근 국내 탄소배출권 가격(KAU22)은 상장 이후 최저치를 경신하는 등 하락세다. 지난 7월에는 톤당 8000원선이 붕괴되기도 했다. 배출권거래시장은 2015년 1월 12일 상장 당시 톤당 8640원으로 개장했다. EU 등 다른 국가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다.
실제로 한국개발연구원의 '배출권거래제 시장 기능 개선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EU를 비롯한 주요 국가의 온실가스 배출권 가격이 2~3배 상승하는 동안 한국은 1/3 수준으로 하락했다.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가 상향되면서 배출권 수요가 증가할 걸로 전망됐지만 가격은 오히려 급격히 떨어지는 추세다.
국내 배출권 가격은 2019년 말에서 2020년 초반까지는 주요 배출권거래제 중 가장 높은 수준을 보였다. 하지만 요즘은 사뭇 다른 분위기다. 한국의 지난해 12월 배출권 가격은 톤당 11.84달러로 2019년 12월(35.43달러)에 비해 66.6% 하락했다. 반면 같은 기간 EU는 26.97달러에서 91.38달러로 238.8% 급등했다.
◆정부의 해결사 기능 너무 강하면 시장 기능 약화 = 이월제한 제도를 완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오는 이유다. 정부는 배출권 거래 시장 활성화를 위해 미사용 배출권의 이월을 제한한다.
2일 업계 관계자는 "배출권은 기본적으로 기업의 무형 자산인데 이를 정부가 어느 정도 선까지 개입하는 게 적정한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며 "배출권거래제는 자율 경제시장 체제하에서 온실가스를 감축하도록 하는 제도인데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정부가 해결사 역할을 자처하며 지나치게 개입을 하는 게 적절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이어 "배출권거래제 시장 활성화를 이유로 정부가 미사용 배출권 이월을 제한하고 있는데 이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며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온실가스를 감축할 노력을 하지 않은 채 시장에 문제가 생기면 정부가 또 해결해주겠지라는 식의 잘못된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EU와 미국 RGGI, 뉴질랜드 등은 배출권 이월을 무제한으로 허용한다. 미국 캘리포니아는 보유량 허용치를 통해 이월을 제한한다. RGGI는 미국 북동부의 12개 주가가 참여하는 발전부문 대상의 배출권 거래시장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와 캐나다 퀘벡 등은 지역 배출권거래제인 WCI를 운영 중이다.
나아가 배출권 가격 불확실성으로 인해 중장기 감축투자보다 저가매매 단기 전략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고질적인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NDC에 상응하는 배출권 허용총량을 사전에 확정해 기업들이 장기적으로 대비할 수 있도록 하는 일도 숙제다.
환경부 관계자는 "이월제한 완화를 할 방침이지만 어느 정도 수준으로 조정을 해야 할지 이해관계자들과 논의 중"이라며 "기업들의 시장 예측성을 강화하기 위한 측면에서 제4차 배출권거래제 기본계획을 법정기한인 2024년 12월에서 1년 앞당겨 올해 안으로 수립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예정대로 올해 말에 제4차 배출권거래제 기본계획이 나오기 힘들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는 상황이다.
[용어설명]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 = 온실가스 배출자가 배출량에 비례하여 가격을 지불하도록 하는 제도다. 정부가 온실가스 배출권을 발행하고 기업들은 온실가스 배출량만큼 배출권을 시장에서 사서 정부에 제출한다. 기업(할당업체)마다 감축 목표량이 있고 목표량만큼 감축하지 못하면 배출권을 구매해야 한다. 만약 이를 지키지 못하면 과징금을 문다. 반대로 목표량을 초과하면 그만큼 배출권을 내다 팔 수 있다.
온실가스 배출권 구매비용이 기업에 부담으로 작용하면 탄소집약적 물품의 생산비용과 가격이 상승할 수밖에 없다. 자연히 소비자들은 비싼 탄소집약적 물품 소비를 줄이고 온실가스 배출도 감소하게 된다.
■이월제한 = 여유분을 보유한 기업은 배출권을 판매한 양에 비례해 남은 배출권만 다음 연도로 넘길 수 있다. 이월제한 제도는 2019년 거래량이 급감하는 등 시장이 불안정해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