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와 함께 하는 과학산책

전선에 전기가 흐르는 것도 양자역학 때문이라고?

2023-08-08 10:57:29 게재
박용섭 경희대 교수, 물리학

오늘날 인류가 누리는 문명은 '전기문명'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우리의 일상은 전기와 떼어놓고 생각하기 힘들다. 전기문명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 전기를 잘 통하는 물질인 도체와 그렇지 않은 부도체이고, 도체와 부도체의 중간적 성질을 가진 반도체가 현대 정보혁명시대의 총아로 떠오르고 있기도 하다.

금속과 같은 도체에서는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본 '옴(Ohm)의 법칙'에 따라서 저항이 클수록 더 큰 전압을 걸어야 동일한 전류를 흘릴 수 있다. 도체에 전류가 흐르면 열이 발생하고 온도가 높아지면 저항이 더 커진다.

독일의 물리학자 폴 드루드(Paul Karl Ludwig Drude)는 1900년에 물질 안에는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전자들이 많이 있어서 이들의 흐름이 전류라는 생각을 했다. 처음 제안한 것은 전하를 띤 입자인 전자를 발견하기도 전이었지만 이후 연구를 통해서 전자를 서로 상호 반발력이 거의 없는 기체로 취급하는 이 자유전자 모형은 금속에서 전류가 흐를 때 나타나는 실험 현상들을 잘 설명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모든 물질은 원자로 되어 있고 각각의 원자에는 많은 전자들이 있는데 어째서 금속 같은 물질에서만 자유전자가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유전자 모형에 의하면 전자 기체가 가끔 다른 전자나 원자와 부딪히는 것이 도체에서 전기저항이 나타나는 원인이었다. 그러나 물질을 이루고 있는 원자나 전자의 밀도를 생각해보면 전자는 끊임없이 다른 원자나 전자와 충돌해야 하지만 실험 결과는 이런 충돌이 실제로는 가끔씩만 일어난다는 것이고 당시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양자역학 완성된 후 전자의 거동 이해돼

이에 대한 답은 1930년대에 양자역학이 완성되고 미시세계에서 전자들의 거동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후에야 얻을 수 있었다. 양자역학의 창시자중 한 사람인 하이젠베르크의 첫 제자인 블로흐(Felix Bloch)는 규칙적으로 배열된 결정안의 원자들과 이에 속한 전자들이 어떻게 서로 결합하고 거동하는지를 규정하는 '블로흐 정리'를 증명했다. 원자 하나에 대해서 확립된 양자역학 이론을 수없이 많은 원자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결정 고체에도 적용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다.

블로흐의 정리를 이용해 결정 고체의 전자 상태를 계산해 보면 어떤 물질이 도체가 되고 어떤 물질이 부도체나 반도체가 되는지를 알려주는 전자 밴드구조를 계산할 수 있다. 고체물질에 대한 현대적인 이론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금속을 구성하는 원자가 규칙적으로 배열된 완벽한 결정을 이루고 있다면 전자의 양자역학적 파동함수는 아무런 충돌이나 산란없이 고체 안에서 퍼져나갈 수 있다. 이때 전기저항은 0이 된다. 초전도체가 아니라도 저항없이 전류를 흘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금속을 포함한 대부분의 물질은 완벽한 결정이 아니고 불순물이 존재하며 제자리에 있지 않은 원자도 있으니 이로 인해서 전기저항이 나타난다. 또한 금속의 온도가 절대 영도가 아니라면 내부의 원자들이 열에 의한 진동을 하게 되는데 이 또한 완벽한 결정 구조 위치에서 벗어나는 것이므로 전자와 산란이 발생해 전기저항에 기여한다.

이렇게 물질 속을 흘러가는 전자들의 양자역학적 거동을 이해하면 전자들이 금속 내부에 존재하는 수없이 많은 원자와 산란없이 먼 거리를 날아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원자의 밀도에 비해서 실제 전자의 파동함수를 그냥 보내지 않고 산란시키는 결정의 결함이나 불순물의 밀도는 상대적으로 매우 낮기 때문에 충돌이 가끔씩만 일어나는 것이다. 불순물이 거의 없는 금속물질을 만들면 저항이 감소하는 현상도 설명이 된다.

모든 물질은 양자물질이다

뿐만 아니라 금속의 결정구조를 점점 더 완벽에 가깝게 만들거나 온도를 낮추면 저항이 감소하는 현상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온도가 내려가면 열에 의한 원자의 진동이 작아지고 전자의 파동함수가 산란할 확률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성질을 이용해서 어떤 금속 시료가 얼마나 불순물 없이 순수하고 완벽한 결정에 가까운지의 척도로 저온에서의 저항이 얼마나 작은지를 사용하기도 한다.

전자의 밀도 역시 원자의 밀도와 비슷한 정도로 높은데 왜 전자끼리는 충돌하지 않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복잡한 고도의 양자역학적 이론을 필요로 한다.

일상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전선에 전류가 흘러가는 현상도 양자역학을 모르면 이해하기 어렵다. 그야말로 모든 물질이 양자물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