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한국경제 딜레마에 진퇴양난 한은
한국은행이 여섯차례 연속 기준금리를 동결했다. 물가·환율불안, 가계를 비롯한 경제 전반의 부채 총량 증가 등의 문제와 사상 초유의 2.0%p 미국과의 금리격차 등은 금리를 인상해야 하는 요인이지만 국내 경기만 떼어놓고 보면 오히려 인하가 필요한 상황이다. 올해 1월 0.25%p 인상한 이후 10개월째 3.5% 금리동결을 결정한 가장 큰 원인은 '불확실성' 때문일 것이다. 성장경로, 물가경로, 가계부채 추이, 지정학적 긴장 등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한국경제의 딜레마다.
기준금리 3.5%로 6연속 동결…안갯속 경제에 '관망' 택한 한은
우선 금융시장이 또 불안정하다. 지난해 레고랜드 사태 이후 불거진 부동산 프로젝트파낸싱(PF) 부실 리스크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2금융권과 건설업계의 자금난을 심화시킨다. 금융권에 따르면 뱅크런 위기에 처했던 새마을금고가 최근 고금리(9~12%) 특별판매 예적금 상품을 잇달아 내놓고, 저축은행은 4~5%대 예금상품을, 증권사들도 4%대 초반의 금리에 양도성예금증서(CD)를 대량으로 발행하는 등 자금시장이 불안정한 양상이다. 레고랜드 사태 이후 단기금융시장이 경색되자 2금융권이 수신금리를 올려 조달했던 자금의 만기가 돌아오기 때문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중동발 전쟁 리스크 확산에 미 연준(Fed)발 금융긴축이 가해지면서 10년물 미국채 금리가 5%에 육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9일 금융통화위원회의 이후 서울 채권시장에서 10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전 거래일보다 7.5bp(1bp=0.01%포인트) 오른 연 4.362%로 마치며 연고점을 경신했다. 이는 채권시장에서 유동성 경색이 일어났던 지난해 10월 말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한은으로서는 금리를 올리자니 부동산발 경제 위기의 뇌관을 건들지 않을까 걱정이고, 그렇다고 그냥 놔두자니 거품 붕괴의 위험성을 더 키우는 것이 아닌지 진퇴양난이다. 국제금융협회(IIF)가 발표한 글로벌 부채 모니터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경제규모(명목 국내총생산)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23년 2분기 말 기준 101.7%로 스위스 126.1%, 호주 109.9%, 캐나다 103.1%에 이어 네번째다. 글로벌 평균 61.9%에 비해 40%p 이상 높다. 국가 부채위험 평가지표로 널리 사용되는 국제결제은행(BIS)의 신용갭률(credt-to-GDP gap)도 2023년 1분기 12.7%로 2019년 말 1.0% 이래 연속 12분기 경보단계(기준 10% 이상)를 보인다. 이 기간 동안 대부분의 주요국들이 '부채축소'를 통해 정상수준과의 괴리를 좁혔던 데 비해 우리는 정치 경제적 여러 상황 아래 제대로 부채축소를 하지 못했다는 결론이다.
한국은행의 자금순환표에 따르면 6월 말 기준 비금융법인의 채권과 대출금은 2561조9920억원이다. 이중 1년 안에 갚아야 하는 단기차입금 비중은 601조8310억원으로 집계됐다. 코로나 팬데믹 전인 2019년 말보다 54%가 늘었다. 게다가 한은이 작년 말 외부감사 기업 2만5135곳을 조사한 결과 한계기업이 3903곳에 달했다. 특히 장기 한계기업은 903곳에 이른다. 경기가 부진한 가운데 시장의 고금리가 지속되면 한계기업 중 유동성 위기에 빠지는 곳이 줄이어 나올 수 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최근 "높은 가계부채 증가세를 국내총생산 대비 100% 이하로 내려야 할 필요가 있다"며 금융불안정에 대한 우려의 시각을 드러냈다.
난관을 뚫고 나가기 위해서는 국민과 함께 하는 구조개혁에 나서야
정부는 성장률이 올해 '상저하고'를 보인 뒤 내년에 상승 쪽으로 방향을 틀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나 일각에서는 저성장 고착화에 대한 우려를 제기한다. 최근 수출이 다소 회복세를 보이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대외 변수가 많아 앞으로의 상황은 장담하기 어렵다. 이창용 총재는 최근 모로코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연차총회 기자간담회에서 "인구구조 트랜드를 보면 2% 정도가 한국의 잠재성장률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고령화 때문에 점차 낮아진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라며 "미국도 2% 성장을 하는데, 한국경제가 구조개혁을 하면 2%로 올라가는 것이고 그 선택은 국민과 정치에 달려 있다"며 고심 깊은 말을 했다.
우리 경제가 직면한 가계부채를 비롯한 문제들은 정부와 한은이 제대로 문제를 파악하고 적절한 재정·통화정책의 조합을 통해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저출생 고령화와 잠재성장률 하락, 치열한 산업 기술경쟁 등의 난관을 뚫고 나가기 위해서는 결국 국민과 함께 하는 정치·경제·사회의 구조개혁에 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