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슬금슬금 다가오는 대규모 정전위기

2023-10-31 12:02:38 게재
전력공급 여력이 충분한데도 대규모 정전(블랙아웃)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인 '사용후 핵연료'를 더 이상 보관할 장소가 없어 원전 가동이 불가능하거나 송전선로가 부족할 경우 이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지금과 같은 안이한 에너지 정책으로는 이같은 일을 피하기가 어렵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견해다.

현 정부는 전임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폐기한 데 이어 신규 원전 건설 검토를 공식화했다. 하지만 발전소를 새로 건설하더라도 이를 둘러싼 인프라를 적기에 갖추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을 저장할 곳이 없어 기존 원전의 가동이 불가능하거나 송배전선로를 적기에 갖추지 못해 산업체와 가정에 전력을 공급하지 못하게 되면 블랙아웃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고준위 방폐장 건설 근거가 될 특별법 2년째 국회서 표류

우리 사회는 갈수록 전기의존도가 높아질 것이다. 조리 기구가 가스렌지에서 인덕션으로 바뀌고 전기자동차가 대중화하는 등 산업과 생활 전반의 전기화(electrification)가 가속화할수록 전력수요는 급증할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을 영구 보관할 시설이 없다. 이에 따라 10만년 간 치명적인 독성물질을 내뿜는 위험물질인 2만t에 가까운 사용후 핵연료를 원전부지 내 물탱크(수조)에 임시보관해 오고 있다. 수조에 균열이 생겨 수조 내의 물이 빠지거나 발전소 전원이 끊겨 냉각펌프 작동이 멈출 경우 수조 안에 저장된 사용후 핵연료가 녹아내려 가공할 대형사고가 나게 된다.

문제는 7년 뒤인 2030년 한빛원전을 시작으로 원전의 임시 저장시설 용량이 차례로 포화상태에 이른다는 점이다. 영구처분시설 건설에는 무려 37년이 소요된다. 하지만 아직까지 건설부지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원전이 제대로 가동되려면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처분장(방폐장)이 완공될 때까지 중간저장시설이 구축돼야 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고준위 방폐장에 중간저장시설을 함께 설치할 계획이다. 중간시설 구축에는 최소 7년이 걸린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사용후 핵연료를 안전하게 보관할 '골든타임'이 이미 지났다고 지적한다. 그런데도 고준위 방폐장 설립의 법적 근거가 될 특별법이 2년째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다.

또한 발전설비 용량이 충분하더라도 송전선로가 부족하면 산업체나 가정에서 전기를 사용할 수 없다.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는 현재 4만여개의 송전탑과 3만5000여km의 전선으로 이루어진 송전망을 통해 전달된다. 전력은 수요가 적은 지방에서 대거 생산돼 송전선로를 통해 수요가 많은 수도권으로 공급된다. 전력을 많이 소모하는 데이터센터(IDC)와 반도체라인 신·증설이 수도권에 집중되고 있어 이같은 현상은 더욱 심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나라의 전력망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호당 정전 시간은 연간 8.9분으로 미국(47.3분)과 영국(38.4분)은 물론 독일(10.7분)보다도 짧아 안정적이다. 송배전 손실률도 3.5%로 미국(5.1%), 독일(6.8%), 일본(4.7%)보다 낮아 효율적이다.

하지만 우리의 전력망은 큰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한전의 부채 규모가 200조원을 넘어 엄청난 재원을 필요로 하는 송·변전망 사업을 감당하기가 어려워졌다. 게다가 수도권 집중현상으로 지역 간 전력 불균형이 심화하고 있고 지역주민과 환경단체 등의 반대로 송·변전망의 신규 건설이 쉽지 않다.

송전선로 과부화 문제 해결 못하면 대규모 정전 발생할 수도

송전선로 건설은 국가적 명운이 걸린 문제다. 전력이 대량생산되는 동해안 지역에서는 지금도 선로 부족으로 발전소들이 출력을 낮춰 가동하거나 아예 가동을 중단하고 있다.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 설비가 집중된 제주 및 호남 지역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더구나 현재 추진 중인 세계 최대 규모의 수도권 남부의 반도체 클러스터는 2030년부터 순차적으로 가동에 들어가 2050년엔 10GW의 막대한 전력 수요가 예상된다.

전국 송전선로는 대부분이 과부하 운전 중이다. 순간적으로 한계치인 120%를 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과부하 운전을 할 경우 열이 많이 나 냉각수를 뿌려가면서 아슬아슬하게 운영되고 있다. '어떻게 되겠지'라는 지금과 같은 정부와 정치권의 안일한 태도로는 블랙아웃을 피하기 어렵다. 전력공급 문제로 공장 운영에 차질이 발생할 경우 재앙적 수준의 산업 피해가 불가피하다.
박현채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