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행정전산망 먹통사태는 재난
지난 17일 행정전산망 먹통사태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국민들이 입었을 피해규모는 현재로선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지자체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제 때 민원서류를 떼지 못해 부동산·금융거래에서 재산상 피해를 우려하는 사례들이 셀 수 없을 정도다.
앞으로 벌어질 연쇄적인 피해까지 계산한다면 피해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가능성이 많다. 현재로선 지자체 민원현장에서 수기로 발급된 전입신고서와 인감증명서 등이 6282건에 달한다는 지엽적인 통계를 근거로 피해규모를 미뤄 짐작할 뿐이다. 전문가들이 '이번 사태로 인한 피해가 사실상 재난수준을 넘어섰다'고 말하는 이유다.
행정안전부 국가핵심기반 마비됐는데도 재난 아닌 '단순 사고' 분류
이번 사태가 심각한 것은 국민들의 실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지방행정이 올스톱됐다는 점이다. 민원서류 발급뿐만 아니라 예산 인사 복지 회계 등 지방행정 업무 대부분이 멈춰섰다. 이번에 문제가 생긴 새올시스템과 연계해 쓰는 프로그램이 모두 먹통이 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정안전부는 이번 행정전산망 먹통사태를 '단순 사고'로 분류한다. 재난분야 위기관리 표준 매뉴얼에 담긴 41개 유형에 포함돼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재난안전 전문가들의 견해는 다르다. 이번 사태를 재난안전법상 사회재난으로 규정한 '국가핵심기반의 마비'에 해당된다고 보고 있다. 실제 재난안전기본법 제3조 1항에서는 '국가핵심기반의 마비'를 사회재난으로 규정한다.
또한 '국가핵심기반'이란 '에너지, 정보통신, 교통수송, 보건의료 등 국가경제, 국민의 안전·건강 및 정부의 핵심기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설, 정보기술시스템 및 자산 등을 말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재난안전기본법을 그대로 준용하면 이번 사태는 '국가핵심기반의 마비'에 해당하는 사회재난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재난여부가 중요한 것은 정부의 대처방식과 재발방지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정부가 이번 사태를 재난으로 분류했으면 해당부처를 중심으로 중앙재난수습본부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가동해 범정부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지금은 주무부처인 행안부 내부에 대책본부가 마련돼 있어 범정부적 대응이 어렵다.
재발방지책 마련에도 영향을 끼친다. 재난으로 분류되면 법정매뉴얼이 만들어지고 이에 따라 예방·대비·대응·복구단계에 따른 평시 훈련이 실시돼 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다른 부처들은 이와 유사한 상황에 대해 재난으로 분류해 법에 근거한 대응매뉴얼을 갖추고 있다. 금융전산 마비 사태에 대해서는 금융위원회가, 정보통신장애 마비 사태에 대해서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각각 주무부처로 범정부 대응체계를 가동하고 있다. 이는 재난 수준의 상황이 벌어지면 이들 부처가 중앙사고수습본부가 돼 사태를 수습한다는 의미다. 또한 유관기관 상황전파, 재난문자 등도 관련 매뉴얼에 따라 신속히 이루어진다. 하지만 행정전산망 사고는 재난으로 분류되지 않아 법정매뉴얼이 없는 상태다.
전자정부는 역대 정부의 자랑거리였다. '전자정부 선진국, IT강국'이라며 홍보하기 바빴다. 이번 정부도 '디지털 플랫폼 정부'를 주요 정책방향으로 삼았다. '비대면 발급 민원서류 범위 확대' '공공 전산서비스의 민간 개방 확대' '클라우드 기반 전자정보 관리' 등을 통해 전자정부의 범위를 넓히고 있다. 역대급 세수 결손이 예상되는 내년에 '디지털 플랫폼 정부' 관련 사업 예산으로 올해보다 209억원이 늘어난 7925억원을 편성한 것은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재난으로 분류해 대처하고 확실한 재발방지대책 마련해야
정부는 지난해 10월 SK C&C 데이터센터 화재로 카카오톡 서비스 장애가 발생했을 당시 백업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고 카카오를 질타했고 '카카오 먹통 방지법'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정작 정부 전산망은 올해 들어 3차례나 먹통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공교롭게도 주무장관인 이상민 행안부 장관이 22일 영국정부와 디지털정부 협력관련 양해각서를 체결한다. 정부가 전자정부의 외연 확장에만 열중하고 내실은 소홀히 한다는 비판을 받는 지점이다.
이번 사태로 세계 최고수준이라는 평가를 받던 전자정부 시스템 명성에 금이 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현재 중요한 것은 정부가 확실한 재발방지책을 마련하는 일이다. 행정전산망 먹통사태를 재난으로 분류해 대처하는 것이 그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