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9·19군사합의' 효력정지는 근시안

2023-11-23 11:53:56 게재
북한이 '군사정찰위성'을 발사하고 정부가 '9·19남북군사합의' 일부 효력정지로 대응하면서 군사적 충돌 가능성에 대한 우려와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22일 국가항공우주기술총국이 전날 밤 정찰위성 '만리경-1호'를 신형 위성운반로켓 '천리마-1형'에 탑재해 발사해 성공했다고 밝혔다.

정부는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로 임시국무회의를 열고 '9·19군사합의 일부 효력정지안'을 의결한 데 이어 영국을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현지에서 최종 재가했다. 북한의 극렬한 반발이 예상되는 만큼 지난 5년 간 남북 사이에서 '안전판' 구실을 해온 9·19군사합의는 사실상 파기 수순에 돌입했다.

북한 '군사정찰위성' 발사 빌미삼아 비행금지구역 설정 무력화

정부가 9·19군사합의 효력을 정지한 것은 남북관계 역사에서 남측이 먼저 남북합의 이행 중단을 선언한 첫 사례다. 우리가 먼저 합의 효력정지에 나선만큼 북한에 도발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북한의 정찰위성 발사에 직접적 연관성이 없는 9·19합의 효력정지로 맞대응하는 것부터가 딱히 어울리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 정부도 이달 말 군사위성 발사를 앞두고 있는 상황 아닌가.

2018년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된 9·19군사합의는 군사분계선(MDL)을 기준으로 지상·해상·공중에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단하기로 하고 완충구역을 설정해 우발적 군사충돌을 예방하겠다는 것이 핵심 뼈대다. 정부의 일부 효력정지는 그중 공중부분 합의인 비행금지구역 설정 조항(1조 3항)을 무력화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이 매우 예민하게 여기는 부분이어서 접경지역에서의 무력시위 등 북의 대응에 따라 대결의 악순환이 우려된다. 윤석열정부는 집권 초부터 9·19군사합의의 백지화를 겨냥해 왔다. 윤 대통령은 지난 1월 국가안보실·국방부·합동참모본부·국방과학연구소로부터 무인기 대응전략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북한이 다시 우리 영토를 침범하는 도발을 일으키면 9·19 군사합의 효력정지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고 대통령실이 밝힌 바 있다.

정부는 최근 팔레스타인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공격을 빌미삼아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발사를 효력정지의 구실로 삼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러한 정부 방침은 10년 만에 TDS(맞춤형억제전략)를 개정한 지난 13일 한미안보협의회의(SCM)에서 신원식 국방장관이 오스틴 미 국방장관에게 9·19합의 효력정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데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국방부 관계자는 "SCM에서 정부의 입장을 설명했고, 미측은 이를 '경청'했다"고 전했다.

수시로 벌이는 한미연합훈련과 미 공중전략자산의 전개, 핵추진 항공모함 기항과 이에 '강대강'으로 맞서는 북한의 각종 미사일발사로 험악한 한반도정세에서 유일하게 군사적 완충장치로 작동해온 9·19합의마저 효력정지될 경우 향후 어떤 상황이 빚어질까. 우선 군사분계선이나 NLL 인근 해상에서 우발적 충돌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군사분계선 일대에 무인기 비행에 이어 전투기 등이 투입되면 군사적 긴장감이 부쩍 고조될 것은 뻔한 이치다. 남북간 우발적 충돌이 군사적 대결로 확대될 경우 딱히 제어할 방법도 없다. 남북 사이엔 비상시 작동할 군사 핫라인조차 끊긴 상태다.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중국이나 러시아와의 관계도 소원해져 중재할 국가도 마땅치 않다. 한미일 군사공조에 기대 핵을 가진 북한에 '힘에 의한 평화'로만 압박하는 것은 무모한 군사적 모험주의다. 한반도 안전과 평화를 장기적 안목에서 큰 그림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근시안적으로 보는 단견에 지나지 않는다.

우발적 충돌 가능성 높아져 … 상황악화 방지 급선무

한반도처럼 군사력이 초밀집한 곳에서는 압도적 군사력 추구보다는 '힘을 바탕으로 하되 평화적 대화를 병행하는 전략'이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다. 핵이 아니더라도 북한이 휴전선 일대에 빽빽이 배치된 장사정포만 일제히 쏘아대도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그 후 우리 군사력과 미군의 '확장억제'로 북한 전역을 초토화시키고 정권을 멸망시킨들 과연 '승리'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실종된 대화노력을 되살려야 한다. 당장 대화가 어렵다면 현 상황을 더 이상 악화시키지 말고 현상유지하면서 언젠가 다가올 대화의 기회를 준비해야 하는데 거꾸로 군사적 대결을 높이는 쪽으로만 질주하니 과연 무엇을 노리고 하는 행태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이원섭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