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가자전쟁과 원유 확보
짧은 휴전 후 이스라엘 공격이 재개돼 가자지구 민간인 희생자가 속출하던 6일, 일본 기시다 총리는 네타냐후 총리와 20분간 전화통화를 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기시다는 3가지를 말했다. 포격으로 민간인 희생자가 늘어나는 것은 피해야 하고, 국제인도법을 포함한 국제법 준수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이-팔이 공존하는 '두 국가 해법' 지지 입장을 밝혔다. 사실상 네타냐후에게 강하게 항의한 셈이다.
기시다의 이런 모습은 이례적인 게 아니다. 하마스의 잔혹한 공격 직후 미·영·독·프·이 등 5개국은 이스라엘 지지성명을 냈지만 일본은 빠졌다. 기시다는 SNS에서 하마스를 비판하면서도 "가자지구에서도 다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을 우려한다. 모든 당사자에게 최대한 자제를 촉구한다"고 했다.
10월 17일 일본은 미국보다 먼저 가자지구에 1000만달러(약 135억원)의 인도적 지원을 발표했다. 11월 3일엔 기미카와 외무상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서안지구를 방문했다. 기미카와는 이스라엘 외교장관을 만나 하마스를 비판하면서도 전투중단과 국제법에 따른 행동을 촉구했다. 팔레스타인자치정부 외교장관을 만나선 6500만달러(약 850억원)의 추가 지원을 약속했다. 지난 8일 유엔 안보리의 '즉각적인 휴전 결의안' 표결에서 미국은 거부권을 행사하고 영국은 기권했지만, 일본은 찬성표를 던졌다.
가자전쟁 후 중동국가의 독자노선 가속화
일본이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미국과 다른 노선을 택한 핵심 이유는 원유 때문이다. 지난해 일본은 원유의 94%를 중동지역에서 수입했다. 일본은 천연가스를 개발하는 사할린 프로젝트 지분을 지키기 위해 러시아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 일본 언론은 미국과의 동맹이 외교의 주축이지만 에너지 확보에 관한 한 독자적 색깔을 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가자전쟁을 계기로 중동지역이 탈미국 노선을 강화하면서 일본의 독자·균형외교도 어려움에 처했다. 지난 5일 이라크 석유부는 이라크 남부의 광대한 에리두 유전이 포함된 블록10지역에 대한 일본 석유기업 인펙스 코퍼레이션의 지분 40% 매각하도록 해 러시아기업 루코일이 지분 전체를 차지하도록 했다. 이라크는 베네수엘라 사우디 이란에 이어 네번째로 많은 원유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다(2015년 말 기준). 중동언론은 이라크 결정에 대해 '서방의 최대 플레이어를 몰아냈다'고 보도했다. 균형외교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서방의 일원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또 하나 주목을 끈 사건은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중동 국가 정상들의 잇단 상호방문이다. 지난 6일 푸틴은 UAE와 사우디아라비아를 전격 방문했다. 수행단에 라브로프 외무장관, 벨루소프 제1부총리, 만투로프 산업통산부장관, 노박 부총리, 나비올리나 중앙은행총재, 보리소프 우주기업 로스코스모스 대표, 리카세프 원자력기업 로사톰 대표, 드미트리에프 러시아 직접투자기금 대표, 카디로프 체첸공화국 수장 등이 함께 했다. 외교 군사 분야뿐만 아니라 금융 산업 핵 인공지능 우주개발 국제직접투자 등 전방위적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푸틴은 귀국 당일 러시아를 방문한 이란 라이시 대통령과 회담했다. 사우디 UAE 이란 이집트는 내년부터 브릭스 회원국이 될 예정이다.
오만의 청소년·문화·체육부장관인 테야진 왕세자는 최근 러시아에서 열린 한 포럼에 참석해 "현재의 불공정한 세계질서와 서구의 지배를 종식하고, 이중잣대가 없는 새로운 공정한 세계 질서와 경제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1만70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민간인 희생에도 이스라엘 폭격이 계속되고 이를 미국이 지원하자 중동 국가들이 미국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가속하고 있는 것이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은 균형외교가 기본노선
중동국가의 이런 움직임은 우리나라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일본과 같은 독자적 외교성과도 부족하고, 미국에 의존하는 노선을 택하고 있어 자칫 원유 확보에 문제가 생길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원유 수입에서 중동 비중이 70%를 넘는다. 안정적이고 값싼 에너지 확보는 국가의 생명줄과도 같다.
특히 우리나라는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라는 점에서도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외교가 기본노선이어야 한다. 미중 편가르기에 편승하는 것은 자해행위가 아닐 수 없다. 세계질서가 다극화되는 속에서 균형외교는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외교노선에 대한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