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ASML 반도체 동맹의 이면

2023-12-14 11:42:15 게재

한국과 네덜란드정부가 반도체 관련 글로벌 공급망 위기에 공동대응하는 '반도체 동맹(Chip Alliance)'을 구축하기로 했다. 우리 정부 차원에서 공동성명 문안에 특정 국가와 '반도체 동맹'을 명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네덜란드로서도 처음이라고 한다. 공동성명에는 반도체 동맹 구축과 함께 △반도체 대화 신설 △반도체 인력 양성 프로그램 개설 △핵심 품목 공급망 회복력 증진을 위한 정부 간 지식·정보 교류 등이 명기돼 있는데 '동맹'의 실질적 내용으로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의 13일(현지시간) ASML 본사 방문을 계기로 양국 정부는 '첨단반도체 아카데미' 신설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고, 실질적인 반도체 기업간 협력으로 삼성전자와 ASML은 공동으로 1조원을 투자해 국내 차세대 반도체 제조 기술 연구개발(R&D) 센터를 설립키로 했고, SK하이닉스는 ASML과 극자외선 노광장비(EUV)용 수소가스 재활용 기술을 공동 개발키로 했다.

우리나라는 물론 네덜란드도 최초인 '반도체 동맹' 구축

우리나라나 네덜란드나 미국이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봉쇄하기 위해 결성한 '칩4 동맹'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만큼 독자적인 동맹의 형식과 내용을 갖추기보다는 반도체 공급망 내에서 교류협력을 보다 강화한다는 방향 정도의 비중일 것으로 보인다.

ASML은 2000년대 초부터 자외선 리소그래피 장비의 상용화를 위해 씨름해왔는데 원천기술은 사실 인텔이 고안하고 투자한 관련 회사들과 미국 국방성 등이 투자한 연구소 등의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실용화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2012년 삼성전자와 미국의 인텔, 대만의 TSMC는 차세대 반도체를 만들기 위한 실용적인 노광장비 개발을 위해 각각 ASML에 직접 투자하는 형식으로 협력했다. 이때 삼성전자는 ASML 지분 3.0%를 매입한다.(인텔 15.0%, TSMC 5.0%) 삼성전자가 금융감독원 다트(DART)에 공시한 올해 3분기보고서를 보면 현재 지분율은 2분기 0.7%(275만72주)에서 더 줄어든 0.4%(158만407주)다. 삼성전자는 2016년에도 투자자금 회수 차원에서 ASML 보유지분 절반을 매각한 바 있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삼성전자는 1982년 ASML(당시 명칭 ASM)을 인수할 기회를 가진 적도 있다. ASML은 당시 네덜란드 필립스가 보유하고 있었는데 삼성전자에 인수를 제안했고 삼성전자 관계자들이 미국 본사로 찾아가 실사를 하기도 했다. 다만 당시의 ASML은 아직 업력이 짧았고 삼성도 자금사정 등이 여의치 않아 인수를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신 ASML로부터 반도체 클린룸의 먼지 생성 방지 등 몇 가지 기술을 벤치마킹해 삼성전자의 반도체 생산 공정에 도입했다고 한다.(김광호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초대 회장, 전 삼성전자 부회장의 증언)

ASML의 극자외선 장비는 비록 대부분 네덜란드에서 조립되지만 실제로 네덜란드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ASML은 미국이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반도체 공급망(미국의 기술, 일본의 소재부품장비, 우리나라와 대만의 파운드리 및 D램 제조)의 상징적인 회사나 다름없다. EUV를 독점적으로 생산하고 있는 '슈퍼을' 회사로 불리기도 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인텔의 2012년 기준 40억달러 이상의 투자, 앤디 그로브와 제이 라스롭을 비롯한 미국 반도체 공학자들의 기술 개발, 레이저 광원 제조 분야의 핵심 업체, 독일의 공작기계 산업의 성과 등 반도체와 레이저 관련 과학 공학 네트워크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회사다.

기술 구현의 핵심 부품은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고 캠퍼스 출신의 레이저 과학자 두명이 만든 회사 사이머, 독일의 정밀 기계 업체인 트럼프, 세계에서 가장 첨단의 광학 시스템을 만드는 회사인 독일의 자이스에서 나왔다. 물론 독일의 이들 기업도 결정적인 요소는 미국이 만든 장비에 의존한다.

전세계 반도체 관련 '기술·산업 네트워크'가 탄생시킨 최대의 성과

ASML은 인텔이 그토록 큰 비용을 부담했음에도 포기한 이 사업을 인수받아 미국 국립연구소가 개발한 기술을 접목시켜 20여년에 걸쳐 외길을 걸으며 성공시켰다. 극자외선 장비 부품 중 ASML이 직접 만드는 것은 약 15%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ASML의 리소그래피 장비는 수십년의 개발과정, 수백억달러의 자금 투자, 수많은 기술혁신,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공급망을 통해 실현된 인류가 만든 가장 복잡한 장비이자, 양산된 공작기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비싼(대당 약 4000억원) 장비이기도 하다.

안찬수 오피니언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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