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증오의 정치'부터 거둬 들여라
사사건건 날을 세우던 정치권이 모처럼 한목소리를 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피습에 대해서다. 피습 소식이 전해진 직후 대통령실은 서면브리핑을 통해 "윤석열 대통령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 벌어졌다'며 이 대표의 안전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고 밝혔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도 대전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절대 있어선 안되는 일"이라며 이 대표의 빠른 회복을 기원했다.
민주당은 "어떤 야만적 테러와 위협에도 굴하지 않겠다"며 한점 의혹없는 수사를 촉구했고, 결별 수순에 들어갔던 이낙연 전 대표나 당내 비명모임인 '원칙과 상식'도 "이같은 폭력행위가 다시는 우리 정치와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경종을 울려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내전에 가까운 적의가 뒤덮은 사회, 안전할 리 없어
대통령실과 여야, 당내 주류·비주류를 떠나 이 대표 피습을 규탄하며 엄중대처를 촉구하고 나선 것은 그만큼 사안이 엄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2006년 지방선거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피습 사건처럼 제1야당 대표에 대한 테러가 미칠 정치적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무엇보다 선거 시기 폭력 자체가 민주주의 근간을 흔들 중대사안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 대표 피습사건의 전말이나 배후야 검경의 수사를 통해 밝혀지겠지만, 차제에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총만 안 들었다 뿐이지 사실상 내전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SNS와 유튜브는 '분노의 공장'이 돼 증오의 언어들을 재생산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강화하는 뉴스에 가짜 여부와 상관없이 '좋아요'와 '팔로우'를 누른다. 그러나 견해가 다르면 동료 시민들에게도 적의를 감추지 않는다. 사이버 광장과 주말 현실광장엔 적대의 언어들이 넘친다. 이들 광장의 시민들은 확증편향의 노예가 되어 "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며 목울대를 세운다.
그러면 이 대표 피습에 대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테러"라고 한목소리로 규탄한 정치권은 여기에서 자유로운가. 윤 대통령은 취임 후 1년 8개월이 되도록 한번도 공식적으로 야당대표를 만나지 않았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정치권에 첫발을 내디디면서 갈등과 대립의 '여의도 어법'으로 이재명 대표와 86세대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검찰 출신 대통령과 비대위원장답게 야당은 범죄집단, 야당대표는 국회의원 쪽수를 방패막으로 삼는 피의자로만 여길 뿐이다. 야당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이재명의 민주당 또한 정부여당에 제대로 협조한 적이 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정부 정책에 무조건 반대하는 '비토크라시(vetocracy)', 개딸의 팬덤에만 의존하는 '팬덤 민주주의'가 진짜 민주주의라고 착각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정치권 스스로가 증오와 적개심을 생존조건으로 삼고 있는 마당에 시민들이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게 말이 된다고 보는가. 이처럼 생각이 다른 사람은 관용할 의사가 없는 사회, 내전에 가까운 적의가 뒤덮고 있는 사회, 정치권이 갈등에 편승하려는 사회가 안전할 리 만무다. 야당대표 피습도 우리 사회의 이런 고질적 문제들이 반영됐다고 봐야 한다. 전문가들 우려처럼 이미 우리 사회는 근대 정치철학의 출발점이었던 '폭력으로부터 안전' 문제부터 새롭게 따져봐야 하는 '시민전쟁(civil war)'에 접어들었는지 모른다.(박상훈의 책 '혐오하는 민주주의')
정치권부터 '민주주의 파괴' 앞장서지 않았는지 성찰하길
이 대표 피습사건을 놓고 여야 정치권 모두 '민주주의 파괴'를 우려했지만, 정작 정치인들 자신부터가 민주주의 파괴에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 되묻고 싶다. 민주주의에서는 협상과 양보, 타협이 절대 필요하며 후퇴는 피할 수 없고 승리도 언제나 부분적이다. 이러한 제약이 일상적 정치과정이라는 사실을 대통령이나 여야 지도부는 제대로 고민이나 해봤는가.
이제 총선이 본격화되면 증오의 언어들이 더 난무할 것이다. 조금 지나면 언제 피습사건이 있었냐는 듯 여야 모두 적개심을 한가득 품고 날선 공방을 벌일 게 뻔하다. 그러는 사이에 사회는 더 극단으로 나뉘고 그 위에 또다른 정치테러의 씨앗이 뿌려질 것이다.
이 대표 피습 직후 여야 정치권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정말 그러길 바란다면 자신들부터 증오의 정치, 극단의 정치에서 벗어날 일이다. 정치권의 성찰이 없으면 '묻지마 미움'의 시대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