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의정갈등 더 키운 대통령 담화
윤석열 대통령이 1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2000명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의료개혁 완수 의지를 재차 천명했다. 논조는 더 강경해졌다. 1주일 전만 해도 전공의들에 대한 면허정지 처분에 대해 ‘유연한 처리’를 모색해달라면서 의료인과 건설적 협의체를 구성해 대화를 추진해달라고 했지만 이번 담화에서는 ‘의대 증원의 당위성’만 강조해 오히려 대화를 차단한 모양새다.
윤 대통령이 이날 담화 내용은 사실 기존 보건복지부 발표 내용을 집대성한 것으로 새로운 내용이 없다. 애초 대통령이 담화를 통해 대화 제스처를 낼 것으로 기대했던 의사단체나 현장의사들은 더 격앙된 반응이다. 이날 담화는 의료계와 정부부처의 갈등(醫官)을 본격적인 의정(醫政) 갈등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의료계 압박만으로는 해결 안돼
3월 28~29일 리서치앤리서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의대 증원과 관련 ‘증원하되 규모와 시기를 조정한 중재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응답이 57.2%, ‘정부안대로 2000명을 증원해야 한다’는 응답이 28.5%였다. 중재안을 마련하라는 여론이 28.7%p 더 높았다. 윤 대통령은 이러한 여론을 마치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처럼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적인 요구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규모와 시기를 조정한 중재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따뜻함은 버리고 ‘2000명 증원’이라는 차가운 요구와 주장만 거듭 강조했다.
대통령 담화 직후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의협) 차기 회장 당선인은 “논평하고 싶지 않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앞서 임 회장은 여권을 향해 총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엄포를 놓기도 했다. 이러한 엄포는 이번 담화를 계기로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국내 의사 13만명이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하면 100만표는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의사들 상당수는 현재 친지와 지인 등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알리고 있는 상황이다.
전공의에 대한 대통령의 압박도 역효과를 낼 수 있다. 의료계는 전공의에 대한 압박만으로는 해결이 안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수도권 대학병원 교수는 “의협 등 단체를 압박하면 전공의와 의대생들의 반발이 멈출 것이란 정부 판단은 오판”이라며 “MZ세대 전공의들은 이번 문제를 자기의 미래와 연계해 스스로 판단해 움직이고 있다”고 전했다.
한쪽을 누르면 다른 쪽이 부풀어 오르는 풍선효과도 우려된다. 일부 의대 소속 교수들에 따르면 많은 전공의들이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많은 전공의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여건이 좋은 의료선진국에서 이어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의대 증원을 의사 카르텔과의 전쟁으로 규정한 윤 대통령은 성공 신화에 빠져 있는 듯하다. 문제의 근본 원인과 올바른 해법을 찾지 못하고 의료계 때리기에 몰두한다면 더 많은 사회적 비용을 치를 수밖에 없다. 자칫 잘못하면 한국 의료는 향후 몇년 간 회복이 어려울 정도로 황폐해질 수도 있다.
전공의가 떠난 자리를 지켜왔던 의대 교수들마저 근무시간 단축을 의결하고 개원의들도 주 40시간 준법 진료에 나서겠다고 예고해 우려가 커진다. 애꿎은 환자들은 의대 교수들의 진료 축소 소식 등에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환자들은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우리 교수님도 사직할까 봐 너무 두렵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왜 이런 걱정까지 해야 하느냐” 등의 우려를 쏟아낸다.
‘2000명 증원만 빼고 협상’은 정답 아니야
이번 사태는 정부의 전격적인 2000명 증원 발표로 시작됐다. 담화 후 비판이 거세자 대통령실은 “2000명은 절대적인 수치가 아니다”라고 여지를 남겼지만 정부가 좀더 유연한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극한대립을 풀 실마리를 마련할 수 없다. 정부는 어떤 상황에서도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위험에 놓이는 최악의 상황을 막아야 할 책무가 있다.
의사단체들도 너무 멀리 가 있다. 반대만 외칠 뿐 적정한 증원 규모조차 제대로 제시하지 않는다. 지금 의료계는 개원의 중심의 의협 외에 전국의대교수협의회(전의교협), 전공의, 의대생, 병원들이 제각각 입장을 내놓고 있다. 의협의 새 지도부는 의료계의 단일창구부터 만들어야 한다. 모든 주체가 참여하는 대표성 있는 창구를 만들고 정부를 상대로 협상에 나서야 한다. 백지화를 전제조건으로 내세울 게 아니라 대화의 장에 나와 논의하고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환자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정부와 의료계 양쪽 모두 대화의 물꼬를 터야 한다. 양쪽이 강대강 대치를 이어가면 환자만 힘들어진다.
김기수 정책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