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 ‘강대강 대치’에 의료 생태계 붕괴 우려
전공의 이탈 상급병원 경영난에 의료업계 고사 공포감
수금 미뤄진 제약·의료기기 유통업체 6~7월 위기설
간호사·간병사 등 병원 내부 노동자들도 생존권 위협
적절한 의료서비스 못받아 고통 호소 중증환자 증가
#1. “정부와 의료계의 계속되는 강대강 대치에 우리는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다. 본사에서 제품을 받아 납품했는데 수익이 줄어든 병원이 결제를 미루고 있다. 본사 입금 날이 다가오고 있어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답답하다.”
-의료기기 도매상 관계자
#2. “전공의 이탈 전에는 하루 600~700건이던 처방전이 50% 가량 줄어들면서 타격이 크다. 아직은 구조조정을 생각하지는 않고 있다. 주변에서는 직원을 줄였다는 소식이 들린다. 장기화되면 우리도 결국 약사와 직원을 줄여야 할 시점이 올 것으로 생각한다.” -대학병원 앞 약국 관계자
전공의 이탈에 따른 의료공백이 장기화하면서 상급종합병원들의 경영난이 계속되고 있다. 병원들은 비상경영체제로 전환하며 직원 희망퇴직과 급여 반납 등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한계에 달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상급종합병원(상급병원)에서 시작된 경영난이 제약·의료기기 등 의료계 전반으로 전이되고 있어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의료인력 부족으로 인한 상급병원 경영난은 결국 중증환자에 대한 의료서비스 부실로 이어지고 있어 심각성이 더 크다.
17일 의료계에 따르면 오주형 경희의료원장은 최근 구성원들에게 “3월 비상경영체제로의 전환을 결정했지만 매일 억 단위의 적자 발생으로 누적 손실 폭이 커지며 의료원의 존폐 가능성이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며 “당장 6월부터 급여지급 중단과 희망퇴직을 고려해야 할 정도로 절체절명의 상황에 직면했다”고 밝혔다.
김진상 경희대 총장이 “구성원 급여지급 중단 계획은 전혀 없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상급종합병원의 위기감이 얼마나 큰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비용절감 노력으로 역부족 상황 = 지난 2월 20일 전공의 이탈로 외래진료·수술 등이 절반 수준으로 줄어든 상급병원들은 심각한 경영난에 빠졌다. 무급휴가나 성과급 반납 등을 통한 비용 절감에 나서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빅5’로 불리는 주요 상급병원들 사정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서울대병원은 인건비 감축을 위해 간호 인력을 중심으로 무급 휴가를 시행하고 있다. 세브란스병원도 의사를 제외한 전 직원에게 7일간의 무급휴가를 최대 4주까지 받고 있다. 4월까지 희망퇴직 신청까지 받았던 서울아산병원은 현재는 무급휴가만 시행하고 있다.
다른 병원들 사정도 마찬가지다. 충남 천안 순천향대 천안병원도 지난달 비상 경영에 돌입해 무급휴가를 실시 중이다. 제주대병원, 아주대병원, 부산대병원, 경상국립대병원, 전남대병원, 조선대병원 등이 전공의 이탈 이후 비상 경영 체제로 전환했다.
한 대학병원 관계자는 “월급 걱정까지는 아니지만 부서 운영 경비, 학회 지원금이 다 줄고 있다”면서 “최악의 상황이 되기 전에 명예퇴직 신청을 해서 탈출해야 하는 게 아닌지 생각하는 직원도 있다”고 말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노동자 = 간호사 간병사 등 병원 노동자들도 고용 불안이나 수입 감소에 시달리고 있다.
한 상급병원 관계자는 “비상경영 상황에서 의정갈등이 어떻게 종료될지 지켜보는 입장”이라며 “수술과 입원은 50% 줄여 운영하고 있고 계약직과 간호사 신규발령은 중단된 상태”라고 밝혔다.
대한간호사협회 관계자는 “수입이 줄어드니 간호사들에게 무급휴가를 강요하는 상황이 벌어져 한 병원은 30일까지 쓸 수 있던 휴가를 100일로 늘리기도 했다”며 “상황이 장기화하면서 직장을 잃을까 고용불안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신규 간호사는 전년도에 뽑아 2월 국가시험 발표 후 성적순으로 채용하는데 이게 중단된 상태”라며 “4학년 대상 예비간호사 모집 공고도 나야 하는데 도미노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의료진은 아니지만 병원에서 일하는 간병사들은 줄어든 수입에 고통을 호소한다.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에 따르면 상급병원 간병사 100명의 소득 변화를 조사한 결과 이들의 일주일 중 근무 일수는 의사 집단행동과 의·정 갈등 이전인 1~2월에는 평균 3.9일이었지만 3월에는 평균 2.2일, 4월에는 2.0일까지 줄었다.
이에 따라 월 평균 수입도 1~2월에는 평균 211만1400원이었지만 3월에는 42.45%가 줄어든 121만5000원이었다. 4월 평균소득도 1~2월 대비 47.83% 줄어든 110만1600원에 불과했다.
조사에 참여한 간병사들은 “병실이 많이 비어 그만큼 우리 수입도 많이 줄었는데 너무 힘들다” “월세·공과금·보험료 등 한 달에 나가는 돈은 정해져 있는데 일이 딱 끊어지니 정말 죽을 지경이다”고 호소했다.
◆대금결제 기한 연기 확산 = 전공의 이탈에 따른 경영난이 병원을 넘어 관련 산업계로 확산되고 있는 모양새다. 경영난에 봉착한 병원들이 의약품과 치료재료 등의 대금 결제를 미루는 것이 주요 원인이다.
서울대병원과 분당서울대병원은 최근 의약품 대금결제 기한을 3개월에서 6개월로 연장하며 지난달 대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병원측은 오는 7월 말까지 대금을 결제하겠다고 했지만 현재 경영상황을 감안하면 이마저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문제는 다른 상급병원들 역시 대금결제 기한을 연장했거나 지급 연기를 고민 중이라는 점이다.
한 대학병원 관계자는 “물품 납품업체 대금 지급은 일단 미루고 있다”면서 “업체들 사정도 알지만 눈덩이처럼 늘어나는 적자에 직원도 월급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병원 앞 대형약국도 구조조정 = 특히 대학병원과 제약회사 중간에 끼인 의약품 도매업체들 상황은 심각하다.
납품한 병원에서 약품비를 받아 제약회사에 비용을 지불하는 구조라 유동성 압박이 심하다.
상황이 악화되자 업계는 제약사들에게 고통 분담 차원에서 대금 지급 기한 지연에 따른 협조를 요청했다.
하지만 제약업계는 아직까지 뚜렷한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도매업체가 제약회사에 대금을 지급하는 기한은 통상 3개월 이내로 알려져 있다.
제약업계뿐 아니라 대형병원과 근접한 이른바 ‘문전약국’의 한숨도 깊어지고 있다.
병원들이 외래 진료·수술 등을 축소하면서 처방 건수가 줄어들고, 의대 교수들이 휴진을 확대할 조짐이라 약국의 경영난은 더 심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서울아산병원 인근 약국 관계자는 “매출이 30% 이상 줄어든 것 같다”면서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어 고민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임대료에 은행이자에 지출은 줄지 않는데 수입이 줄어들고 있다”면서 “일단은 버텨보자는 생각에 버티고 있지만 장기화할 것 같아서 고민스럽다”고 말했다.
◆수술관련 업체 매출 80% 하락도 = 상급병원이나 대학병원뿐 아니라 1·2차 병원과 동네 약국 등에도 납품하는 제약업계 사정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치료재료나 수술기구 등 대형병원 매출이 절대적인 의료기기 업계는 도산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상급병원들의 대금 결제 연장 통보가 잇따르자 협회가 나서 사태 해결을 호소했다.
의료기기 업체 관계자는 “전체적으로 업계 매출이 30~40% 가량 줄었고, 특히 수술 관련 업체들은 많게는 80% 이상 매출이 줄었다”면서 “의료기기 시장은 ‘선납품 후결제 구조’라 제때 수금을 하지 못하면 직원들에게 월급을 못 준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아직 구조조정을 생각하지 않고 버티고 있지만 주변에서 인력 조정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면서 “대부분 소기업인 유통업체들은 현재 상황이 장기화되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외국계 의료기기업체 관계자는 “대리점들이 아직까지는 버티고 있지만 매출감소와 수금지연이 장기화될 조짐이라 걱정들이 커지고 있다”면서 “업계에서는 지금 상황이 6~7월까지 계속되면 줄도산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상급병원 경영난이 장기화될 경우 필수 의료 제공과 비상진료체계 유지에 차질이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한 정부도 5~7월 3개월간 건강보험을 선지급하기로 했다.
이는 당장 병원 경영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지만 근본적인 해소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위기는 계속될 전망이다.
◆최종 피해자는 환자 = 더 큰 문제는 의료 공백이 장기화되고 의료 생태계가 부실 또는 붕괴될 경우 그 피해가 고스란히 환자들의 고통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암 진단을 받았지만 상급병원에서 진료를 거부당하고 수술 취소 후 무기한 대기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의료계 한 관계자는 “통계에는 잡히지 않지만 주기적으로 검사와 치료를 해야 하는 암 환자들 중에 충분한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해 빨리 돌아가시는 분들이 있다”면서 “자기 가족들 중에 아픈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는 지난달 24~28일 환자와 보호자 189명을 대상으로 의·정 갈등에 따른 피해 사례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정상 진료를 받은 환자는 10명 중 3~4명에 불과했다. 외래 지연 34명, 항암 1~2주 지연 22명 등으로 집계됐다. 최초 암 진단 후 상급종합병원에서 진료 받지 못한 경우를 포함한 신규 환자 진료 거부는 총 22건이었다.
협의회는 “환자 중에 항암 치료를 받은 후 5월에 잡힌 수술이 7월로 연기돼 결국 지역 병원에서 수술 받았다”며 “입원 치료를 받던 환자를 집에서 항암치료를 하도록 해 가족들이 간병과 부작용을 감당해야 했다”고 말했다.
수술이 한시 급한 췌장암 환자들의 고통은 더욱 크다.
췌장암 환자 10명 중 6~7명은 정상 진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협의회는 “중증, 응급 환자들은 차질이 없다는 정부와 병원 발표와는 달리 피해사례 중 가장 많은 것은 신규 환자 거부와 응급 사례 거절이었다”며 “암은 계속 판정되고 있는데 항암, 외래 지연은 흔한 일이 됐고 정신적 충격에 쌓인 ‘신규환자’는 진료자체가 거부되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장세풍·박광철·오승완 기자 spj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