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현장 리포트
거꾸로 걸린 성조기와 연방대법관의 공정성 논란
2021년 1월,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한 집 앞마당에 거꾸로 뒤집힌 성조기가 내걸렸다. 거꾸로 된 성조기는 원래 군대에서 조난신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근래에는 다양한 세력이 정치적 항의 표시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2020년 대통령 선거를 ‘도둑맞았다’고 주장하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선거 결과에 불복하는 운동 “도둑질을 멈춰( Stop the Steal)”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2021년 1월 6일 무장한 친트럼프 시위대가 선거 결과 인증을 방해하기 위해 국회의사당에 난입할 당시에도 거꾸로 뒤집힌 성조기가 등장했다.
초유의 폭력 사태를 부른 당시 분위기에 비추어 볼 때 거꾸로 게양된 성조기가 보내는 정치적 메시지는 분명했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미국에서 별 논란거리가 아닐 수 있지만 문제는 이 집의 주인이 바로 미국 최고 사법기관인 연방대법원의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이라는 데 있다.
대선 불복 동조 판사가 트럼프 재판 관여
이달 16일 뉴욕타임스(NYT)는 당시 동네 주민들이 찍어놓은 사진과 함께 얼리토 대법관 집 앞마당에 거꾸로 뒤집힌 성조기가 며칠 동안 게양되어 있던 사실을 보도했다. 얼리토 대법관은 타임스에 보내는 이메일에서 성조기 게양은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다만 자신의 배우자가 이웃집 앞에 내걸린 정치 표지판에 모욕감을 느껴 이에 대응하기 위해 잠시 문제의 성조기를 내건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웃이 내건 트럼프 반대 표지판의 불쾌한 언어 때문에 일어난 단순한 해프닝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해명은 불거진 논란을 잠재우지 못하고 있다. 타임스는 얼리토 대법관이 소유하고 있는 뉴저지 바닷가 별장에도 친트럼프 극우파들의 또다른 상징물인 ‘천국에의 호소 (An Appeal to Heaven)’ 깃발이 작년 여름 내내 걸려 있었다는 후속 보도를 냈다. 얼리토 대법관은 이에 대해 아직 어떤 해명도 내놓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
타임스 보도 직후 민주당 의원들과 법률 전문가들은 거꾸로 뒤집힌 성조기가 대법관의 집 앞에 걸려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대선 결과에 불복하는 트럼프 관련 재판에 공정한 판결을 내릴 수 있을지 의문을 불러 일으킨다고 지적한다. 또한 편향된 입장을 가진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지난 대선과 의사당 난입 사태와 관련해 대법원에 올라가 있는 소송 판결에서 얼리토 대법관이 빠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성조기를 거꾸로 내건 것이 얼리토 법관인지 그의 배우자인지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얼리토 대법관이 자신의 집 앞에 깃발이 게양되고 있는 것을 알고도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라는 점이다.
연방법원의 마이클 폰조 판사는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해 그 행동의 합법성 여부를 떠나 그때 그 상황에서 그런 식으로 성조기를 게양하는 일은 합리적인 윤리의식을 가진 판사라면 누구나 부적절하고 바보 같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라고 얼리토 대법관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린지 그레이엄, 미트 롬니 등 일부 고위 공화당 상원의원들도 얼리토 대법관의 ‘실수’와 ‘잘못된 결정’을 질책했다. 공화당 의원들이 보수 대법관을 비판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연방법에 의하면 법관의 공정성이 합리적으로 의심 받거나 또는 개인적 이해관계나 편견이 있는 경우 판사가 사건을 회피해야 한다. 얼리토 대법관 집 앞에 성조기가 거꾸로 달려 있던 당시 대법원은 트럼프의 대선 불복 소송을 들어줄 것인지 여부를 다루고 있었다. 대법원이 소송을 각하하기로 결정하면서 얼리토 대법관의 입장은 소수의견으로 끝났지만 그가 당시 그 사건을 회피했어야 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또한 다음달 말 대법원 회기가 만료되기 전에 나올 두 개의 주요한 판결이 있는데, 그 첫번째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선거 패배 후에도 계속 자리를 보존하려고 시도한 것을 형사 처벌할 수 있는지 아니면 면책특권의 보호를 받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두번째 케이스는2021년 1월 6일 의사당 난입에 가담한 300여명의 사람들을 법무부가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기소할 수 있는지다. 성조기 사건이 불거진 지금 다시 한번 그가 관련 사건들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대법원 판결은 항상 이데올로기적”
2020년 대선을 둘러싼 법적 공방에서 대법관의 공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또다른 보수 성향 대법관인 클래런스 토머스의 경우 그의 부인인 버지니아 토머스가 2020년 대선 결과를 뒤집으려던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 마크 메도우스 당시 백악관 비서실장과 29차례에 걸쳐 문자를 교환한 사실이 드러났다.
토머스 대법관 부인은 메시지에서 바이든의 당선을 “우리 역사상 가장 거대한 강도짓”이라고 비난하면서 “좌파가 미국을 끌어내리지 못하도록” “이 위대한 대통령이 굳건히 설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우자고 독려했다. 트럼프가 공공연히 대선 불복을 얘기하고 있었고, 그 소송이 결국 자신의 남편이 있는 대법원까지 갈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부인이 이렇게 선거 결과를 뒤집기 위한 노력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었음에도 당시 토머스 대법관은 얼리토 대법관과 마찬가지로 해당 사건을 회피하지 않았다.
이번 거꾸로 된 성조기 게양 보도로 인해 대법원의 공정성과 정치적 중립에 대해 다시 한번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미국의 최고 사법기관인 연방대법원 대법관들은 자발적 사임이나 은퇴 또는 의회의 탄핵이 없는 한 평생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종신직이다.
다른 공직자와 달리 대법관들에게 종신직이 허용되는 이유는 대법원의 판결에 행정부나 의회가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도록 보장하기 위해서다. 정치적 외풍에 흔들리지 말고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헌법의 수호자로서의 임무에 충실하라고 주어진 특권이다. 미국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백악관도 의회도 아닌 연방대법원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막중한 임무에 비추어볼 때 거꾸로 된 성조기 전시는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대법원 자체 지침을 포함해 사법윤리를 위반하는 것이라고 많은 법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코넬대 로스쿨 교수 마이클 도르프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대법원 판결은 항상 이데올로기적이고 당파적인 렌즈를 통해 비춰지지만 특히 대선 불복운동에 강력하게 공감하는 두 명의 대법관이 있다는 사실이 이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린다”고 말했다. 저명한 보수파이자 전 항소법원 판사였던 마이클 루티그는 “대법관과 그 배우자, 가족들은 비난받을 여지가 없도록 행동해야 한다”면서 “존경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대중이 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이는 데 필수적”이라고 했다.
미 국민 60%가 대법원 판결 신뢰 안해
보수 성향 대법관들의 정치적 편향과 사법윤리에 대한 의문이 계속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 60%가 대법원의 판결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대법원에 대한 신뢰도는 지난 2022년 대법원이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헌법적 권리로 보장한 ‘로 대(對) 웨이드’ 판례를 폐기하면서 최저점을 찍었다.
당시 낙태권 폐지 다수 의견을 쓴 사람은 공교롭게도 얼리토 대법관이었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종교에 기반한 자신의 보수성향을 숨기지 않았다. 판결 직후인 2022년 7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종교의 자유 컨퍼런스에 연사로 나와 낙태권 폐지 이후 쏟아진 국제적인 비판 여론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런 판결문을 쓴 것을 ‘역사적인 영광’이라고 표현했다.
얼리토 대법관은 보수적인 대법관들 중에서도 종교적 권리를 가장 강조하는 인사라고 알려졌다. 이번에 불거진 깃발 논란도 얼리토 대법관이 얼마나 공개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고, 그것이 공정해야 할 대법관으로서의 그의 결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한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남수경 뉴욕주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