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재계는 지금 소리없는 생존전쟁 중
“이제는 각자도생이다.” 총선 후 재계에서 흘러나온 얘기다. 정부여당의 압도적 참패로 향후 극한정쟁이 예상되는 만큼 정부에 기댈 게 없어졌다는 판단에서다. 실제로 정부여당이 상속세와 종합부동산세 대폭 완화 등 재계의 오랜 숙원을 풀어주겠다는 방침을 밝혔으나 야당의 냉소적 반응을 볼 때 실현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재계 판단이다. 그러다보니 ‘각자도생’ 움직임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그 대표적 예가 재계의 ‘소리없는 구조조정’ 돌입이다.
지금 재계는 전방위적 구조조정 압박에 직면한 엄중한 상황이다. 중국의 중간재 생산라인 자체 구축으로 석유화학 철강 등의 대중국 수출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대형 유통업체들은 코로나사태를 계기로 급류를 탄 온라인 구매 확산으로 위기에 봉착했다. 글로벌 전기차 신드롬이 시들해지고 중국 전기차의 저가 공세로 이차전지 업체들도 어려움에 처하기는 마찬가지다.
건설업계 일각에선 살인적 고분양가와 세계 최악의 저출산으로 주택업종 자체의 존속 가능성에 강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한국경제를 견인해온 반도체는 AI시대가 도래하면서 메모리 의존 산업의 한계가 드러났다. 동시에 각국의 경쟁적 ‘반도체 굴기’ 정책으로 향후 치열한 경쟁 위험에 노출된 상태다.
정부에 대한 믿음 사라지자 재계 자체 구조조정 돌입
우선 LG화학 금호석유화학 롯데케미칼 등 석유화학업계는 공장매각 가동중단 명예퇴직 투자축소 등 고강도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공장은 대부분 중국업체들에 헐값 매각되고 있다. 이들은 대신 이차전지 등을 신산업으로 설정한 뒤 업종 전환을 추진중이나 이차전지 역시 글로벌 전기차 신드롬이 식으면서 중복과잉투자 우려가 커지고 있어 난감한 상태다. 포스코도 철강 과잉생산 위기에 이차전지용 니켈과 전구체 생산에 뛰어들었으나 갈 길이 만만치 않은 모양새다.
기존 이차전지 3사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의 공장 가동률도 50~60%대로 뚝 떨어졌다. 전기차 시장 부진으로 완성 전기차 업체들의 주문이 줄어든 탓이다. 특히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전기차시장을 이끌어가고 있는 국가들이 전기차 보조금 지급을 중단·축소하면서 큰 타격을 입고 있다.
대형마트들도 영업매장 폐쇄, 계열사 매각 등 숨가쁜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창사 이래 처음으로 지난해 적자를 기록한 대형마트 1위 이마트는 역시 창사 이래 처음으로 전 계열사 직원을 상대로 희망퇴직을 받고 계열사 통합을 추진 중이다. 대형마트 2위인 홈플러스도 작년에 3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며 손실규모도 5000억원대로 커지자 기업형 슈퍼마켓(SSM) 익스프레스 매각에 나섰다. 지난해 가장 먼저 희망퇴직을 실시한 롯데마트는 추가 인력감원을 추진 중이다. 이들 대형마트 3사는 최근 5년새 35개 매장을 폐쇄한 데 이어 올해도 최소 6개, 많게는 11개를 추가 폐쇄한다는 방침이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화로 위기에 직면한 상당수 대기업 건설사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주목할 대목은 건전성이 양호한 D기업 등 일부 대형건설사들도 신규수주 대폭 축소, 명예퇴직 실시 등 ‘탈(脫)주택사업’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업계에선 높은 건축비와 분양가, 저출산 등으로 향후 주택산업의 미래를 어둡게 보고 업종 전환을 추진하려는 게 아니냐는 관측을 하고 있다.
반도체업계도 최근 삼성전자의 반도체 부문 사장 전격 교체에서도 알 수 있듯, 외부적으로 매출-영업이익 증대로 다시 활황기를 맞고 있는듯 보이나 내부적으로 위기감이 크다. 전영현 신임 반도체 부문장(부회장)은 내부게시판에 “반도체 사업이 과거와 비교해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며 “부동의 1위 메모리사업은 거센 도전을 받고 있고, 파운드리 사업은 선두 업체와의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고, 시스템 LSI 사업도 고전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삼성전자의 케치프레이즈인 ‘압도적 초격차 유지’가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는 경고음인 셈이다.
경제 상황에 관심 없는 듯 정치권은 ‘탄핵 신경전’
이렇듯 업계는 지금 소리없는 생존전쟁 중이다. 30대 그룹 중 16개가 쓰러진 IMF외환위기 사태 때와 같은 대형참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용히 끓는 냄비에 갇힌 위기상황에 직면한 건 분명하다.
대통령 지지율이 취임 후 최저로 추락하자 날선 ‘탄핵 신경전’을 펴고 있는 여야에겐 관심밖 상황 전개다.
박태견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