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혁신을 망각할 때 벌어지는 일들
반도체 산업에서 인텔은 비교불가능한 위상을 가지고 있던 회사다. D램을 상업화하고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발명하는 등 혁신적인 칩을 개발하고 제작해내는 능력에서 인텔을 능가할 기업은 존재하지 않았다. 컴퓨터나 데이터센터의 두뇌 역할을 하는 중앙처리장치(CPU)는 인텔에게 막대한 수익을 안겼고 PC용 프로세서 시대 반도체 시장의 지존으로 군림했다. 인텔의 x86 아키텍처는 PC와 데이터 산업의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인텔의 반도체 리더십은 여기까지였다.
반도체 산업이 트랜지스터가 축소되는 극자외선(EUV) 공정 시대로 접어들고, 인공지능(AI) 시대가 열리면서 AI에 필요한 반도체 아키텍처의 거대한 변화를 놓쳤다. 이제 AI시대 반도체 리더십은 그래픽 처리장치(GPU)를 설계하는 엔비디아로 넘어갔다. 아마존 웹서비스, 마이크로소프트 애저, 구글 클라우드, 메타를 비롯해 거대한 데이터 센터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빅테크들은 이제 더 이상 인텔의 CPU를 쓰지 않는다.
AI시대 반도체 주도권 놓친 인텔의 추락
텍사스인스트루먼트에서 반도체의 효율적인 제조공정을 실험하며 수율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 모리스 창(張忠謀. 장중머우)은 1970년대 초 ‘고객이 설계한 칩을 생산해 주는 반도체 회사를 만들 수는 없을까’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러나 모리스 창이 파운드리(Foundry) 개념을 현실화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973년 모리스 창은 이 새로운 비즈니스모델을 텍사스인스트루먼트에 제안했으나 경영진은 이미 충분히 반도체 제조로 돈을 잘 벌고 있었고, 존재하지도 않는 시장에 승부를 거는 모험을 하지 않았다. 모리스 창은 인텔의 공동창업자이자 1965년 ‘무어의 법칙’을 만들어낸 인물인 고든 무어에게 협력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고든 무어는 모리스 창에게 “한때 자네는 훌륭한 아이디어를 많이 제공했지. 그러나 이건 아닌 것 같네”라고 했다.
그러나 모리스 창은 대만반도체회사(TSMC)를 대만정부의 자금지원과 대만 국민들의 투자, 네덜란드 극자외선 장비제조의 독점업체인 ASML을 가지고 있는 필립스의 도움으로 설립했다. 반도체 산업에서 첨단화해가는 가공과 소형화는 가장 어려운 기술적 과제 중 하나였지만 모리스 창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TSMC가 이 한계를 돌파했다.
2020년 직경 100나노미터(1미터의 10억분의 1) 크기의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로 전세계가 락다운에 들어갔을 때 TSMC의 최신 설비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절반 크기, 미토콘드리아의 1/100 크기의 작은 트랜지스터 회로를 찍어낼 수 있었고 인류 역사에서 TSMC만이 이 기술을 성공해 대량생산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앞선 극미세 반도체 프로세서의 기술력은 TSMC로부터 나온다. 애플 아이폰과 엔비디아의 AI 가속기 칩은 오직 TSMC만이 생산한다. 애플 엔비디아 구글 아마존 등 세계적인 빅테크들은 자신들이 설계한 칩을 제발 생산해달라며 돈을 싸들고 TSMC 앞에 줄을 선다. AI 칩 제품인도가 6~9개월 정도 늦어지며 고객들의 독촉이 빗발치지만 인텔과 삼성전자에 맡기지 않는다. TSMC 덕분에 대만은 매년 새롭게 공급되는 칩을 통해 전세계 컴퓨팅 파워의 최대 생산 기지가 됐고, 이제 미국 실리콘밸리와 함께 글로벌 AI산업을 이끄는 양대 축으로 떠올랐다.
K반도체 실패 두려워하지 말고 혁신에 나서야
반도체 기업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혁신에 나서야 한다. 혁신이 멈추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인텔의 사례를 보면 극명하다. 반면 혁신이 성공했을 때 얻는 성과와 보상은 엔비디아와 TSMC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인텔은 여전히 미국정부의 내놓고 밀어주는 정책 덕분에 보조금을 타내고 막대한 수익을 내는 회사이지만 과거 반도체 기술 리더십을 회복할지 전망은 극히 불투명하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이끌어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잘 새겨야 할 교훈이다. AI 반도체 시장 확대로 수요가 급증한 고대역폭 메모리(HBM) 대응으로 성과를 내고 있는 SK하이닉스는 그룹 경영상황이 다소 복잡하지만 혁신을 계속 이어가야 할 것이다.
고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로 대변되는 이른바 ‘신경영 선언’을 한 지 7일로 31주년이 됐다. 이 선언을 계기로 삼성전자는 ‘초격차’의 반도체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엔비디아 젠슨 황의 HBM 관련 립서비스가 아닌 진짜 실력을 삼성전자는 보여주어야 한다.
안찬수 오피니언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