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안보의존과 외교적 자율성

2024-06-14 13:00:01 게재

최근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세력의 부상은 놀라운 일이다.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연합(RN)은 31.5%를 득표해 마크롱 대통령의 집권 여당 르네상스(14.6%)보다 두배 이상 많은 표를 얻었다. 독일의 극우정당 독일대안당(AfD)도 15.9%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선전했다. 반이민 반이슬람 등 극단적인 주장을 펴는 극우세력의 득세는 단순한 정치적 변화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유럽이 자국의 안보를 나토에 의존함으로써 외교적 자율성이 약화되었고, 그 결과 극우세력의 득세를 초래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유럽 국가들은 오랫동안 나토를 통해 자국의 안보를 보장받아 왔다. 나토는 회원국들이 상호 방위를 약속하는 집단방위체제로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동맹이다. 이로 인해 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군사적 지원에 의존하게 되었고 이는 외교정책에서도 미국 입장을 따르는 결과를 낳았다.

우크라이나 지원과 러시아 제재로 인한 유럽의 어려움

우크라이나전쟁은 유럽의 외교적 자율성 약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미국의 주도 아래 우크라이나에 대규모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제공해야 했다. 문제는 각국이 감당 가능한 범위에서 자율적으로 실행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러시아 천연가스 수입금지 조치는 에너지 위기를 초래해 유럽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다. 급격한 물가상승과 산업경쟁력 약화로 인해 유럽 시민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2022년 9월 노르트스트림 파괴 사건은 유럽의 외교적 자율성 상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노르트스트림 가스관은 러시아에서 독일로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중요한 에너지 인프라로, 이 파괴 사건은 유럽의 에너지 안보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소행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유럽 국가들은 철저한 조사보다는 덮으려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독일은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러시아 천연가스의 빈자리를 몇 배나 비싼 미국산 LNG가 메우고 있다.

우크라이나 난민 문제와 같은 이슈에서도 유럽 국가들은 자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최대한 수용을 호소하는 미국 입장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유럽의회 선거에서 반이민정책과 독자적인 외교를 주장한 극우세력의 득세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일 수 있다.

자국 안보의 외국 의존은 단지 군사력 의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안보상황에 대한 판단, 평화 조성 노력 등 핵심 외교사안도 의존할 수밖에 없다. 유럽은 러시아의 안보위협이 현실적인 것인지, 이를 해소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을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대응하기보다 나토에 통째로 의존해왔다. 그 결과 미국은 러시아의 안보위협을 내세우며 유럽의 외교정책에 큰 영향을 미쳐 왔다. 이는 미국이 막대한 재정적자를 감수하고 유럽 안보를 지원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시카고대학의 존 미어샤이머 교수는 유럽 국가들이 자주국방을 포기한 결과 미국의 국익추구 행위에 연루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미국은 안보 위협을 강조하며 유럽 국가들에게 중국을 견제하는 데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5G 통신망 구축에서 중국의 화웨이 배제를 시작으로, 최근 열린 G7 정상회의에서도 러시아를 지원하는 중국에 더 강한 무역압박을 가할 전망이다. 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압박에 맞서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지난 5월 말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독일을 방문해 “미국만 바라보는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되고, 새로운 공동안보 개념을 구축해야 한다”며 “유럽의 진정한 통합은 스스로 안보의 틀을 확립할 때 완성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마크롱이 수십년간 형성된 나토의 집단안보체제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자주국방이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과제

유럽의 외교적 자율성 약화는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유럽 국가들은 자국보다 막강한 러시아에 대항해 미국에 안보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우리보다 훨씬 약한 북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도 안보의존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문재인정부 시절 비무장지대 공원화와 남북철도 연결 등 남북협력을 위한 북한과의 여러 합의가 이행되지 않은 이유도 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미국이 원치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우리 스스로 안보를 책임지지 않는다면 남북관계 개선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음을 말해준다. 자주국방이 다른 어떤 것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장병호 외교통일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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