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하 9625곳 물막이판 설치 못해…대피지원체계 강화해야
서울시 "설치대상 38% 집주인 반대"
침수방지시설 관리·점검 소홀 지적도
침수우려주택 매입·이주는 속도 못내
“똑같이 홍수가 닥쳤는데 옆집은 물에 잠겼고 우리 집은 별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비가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무원이 연락이 왔고 빠르게 대응을 했더니 위기를 피할 수 있었어요.”
18일 찾아간 관악구 신사동에선 구청에서 실시하는 빗물받이 청소가 한창이었다. 담배꽁초로 가득찬 빗물받이는 하수 역류를 일으켜 침수 피해를 키우는 주범이다. 해당 지역은 2022년 8월 호우로 물에 잠긴 반지하 주택에서 사람이 빠져 나오지 못해 인명 사고가 발생했던 곳이다.
지대가 낮아 집중호우 시 피해가 예상되는 주택들엔 대부분 물막이판이 설치돼 있었다. 동네에서 만난 김모씨는 “재작년 사고 이후 구청에서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것 같다”며 “침수 우려 가구에는 거의 설치됐고 빗물받이 청소도 종종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침수방지 시설은 어느정도 갖췄지만 주민들 불안함은 여전했다. 인근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박모씨는 “재작년 사고 때 물이 가게 안까지 들어차 무릎까지 잠겼다”며 “이 동네는 워낙 지대가 낮고 침수되기 쉬운 반지하 가구가 많아 갑자기 폭우가 내리면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난 주민들이 강조하는 건 물막이판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높이에 비슷한 구조로 지어진 집들 사이에 피해 유무를 가른 건 물막이판이 아닌 ‘사람의 힘’이었다는 것이다. 해당 지역에서 15년째 부동산을 운영하며 수차례 홍수 피해를 경험했다는 정모씨는 “침수는 생길 수 있지만 그로 인한 인명 사고는 모두 천재지변이 아닌 인재”라며 “비가 올 때마다 경험했지만 인명피해 발생여부는 시설보다 사람 노력에 달렸다”고 말했다.
정씨는 “재작년에도 우리 점포는 담당 공무원과 연락이 빨리 닿아 서둘러 이동형 물막이판으로 가게 주변을 막았고 나와 가족은 물이 넘치기 전 대피했다”며 “다음날 와보니 가게 안에 들어온 빗물이 채 1㎝도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일대 주민들 의견도 한결 같았다. 기본적인 방재 시설은 당연히 갖춰야 하지만 두뼘짜리 물막이판만 가지고선 피해 방지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 동네 반지하에 살다가 임대아파트로 이사를 했다는 이모씨는 “홍수 때 인명사고를 막는 최선의 방법은 ‘초기 대응’이라며 "구청의 대피 안내 방송과 담당 공무원의 빠른 연락과 방문 등이 커다란 차이를 낳는다"고 말했다.
◆물막이판 설치로 끝? = 대형 사고가 발생했던 지역은 그나마 물막이판, 빗물받이 청소 등에 손을 썼지만 국지성 긴급 호우에 취약한 곳은 여전히 많다. 특히 침수방지 시설을 설치했지만 점검과 관리를 소홀히 해 방재 효과를 기대하기 힘든 사례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물막이판 관리 책임이 거주자에게 있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한 자치구 관계자는 "이번에 점검을 다시 해보니 거주자들이 불편하다고 물막이판을 걷어낸 곳이 의외로 많이 있었고 나사가 빠져 판 자체가 흔들거리는 등 제 기능을 못하는 것도 발견했다"며 "관리 책임이 거주자에게 있다는 이유로 점검을 소홀히 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침수방지대책에 사각지대가 발생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시는 침수 우려 주택 모두에 물막이판과 역류방지기를 설치했다고 밝혔지만 실제 설치 수는 시가 당초 밝힌 필요 주택 수에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시는 침수방지 시설을 설치하려면 집주인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을 어려운 점으로 꼽았다. 침수 주택으로 낙인 찍히는 것을 우려하는 집주인들이 시설 설치를 반대하는 경우가 9625곳이라는 도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소극적 대처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최근 한 환경단체에서 주최한 반지하 대책 토론회에 참석했던 관련 단체 관계자는 "올 여름 또 다시 인명 사고가 발생하면 그때도 집주인에게 책임을 돌릴건가"라며 "다른 나라에선 이미 도입한 침수이력 표시제 등 제도 개선을 위한 노력을 얼마나 했는지 되묻고 싶다"고 말했다.
침수우려 주택 매입과 반지하 가구의 지상층 이주도 속도가 나지 않고 있다. 한국도시연구소에 따르면 2020년 7월부터 2023년 10월까지 서울 반지하에 거주했던 3675가구만 공공·전세임대주택으로 이주했다. 홍정훈 한국도시연구소 연구원은 "서울시는 당초 반지하 특정바우처 목표를 1만가구로 설정했는데 목표 대비 실적은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지적에 서울시도 대책 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침수 예·경보제와 동행파트너가 대표적이다. 특히 인명 사고를 막기 위해 동행파트너 구성·운영에 공을 들이고 있다.
동행파트너는 혼자 힘으로 탈출이 어려운 반지하 재해약자(중증장애, 노인 등)에 대해 이웃주민이 대피를 지원하는 시스템이다. 통·반장, 공무원으로 구성되며 반지하 주민 1명당 3~4명의 담당자를 두고 침수 예보시 전화와 방문, 대피를 지원한다. 사고 초기 인력 대응이 강조되는만큼 올해는 지난해보다 242가구 늘어난 1196가구에 2956명을 배치했다. 이동식·휴대용 물막이도 다수 구비했다. 소형·경량 물막이판 2만개를 자치구 기동반과 자율방재단에 배부했고 시가 보유한 소형 양수기 2만대 중 1만8000대를 이를 필요로 하는 주민센터에 비치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시가 파악한 침수방지시설이 필요한 가구는 2만4842곳이며 이 가운데 멸실, 설치반대 등 때문에 설치가 어려운 9625곳을 제외한 1만5217곳에 대해 설치를 완료했다"고 밝혔다.
이제형 기자 brother@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