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지배구조 정책 ‘단편적·모순적’…일관된 전략 필요”
일본 7위에서 2위로 상승할 동안 우리나라 9위 → 8위로 하위권 머물러
중장기적 거버넌스 개혁 로드맵…상법개정으로 주주보호 방안 마련해야
한국의 기업지배구조 개선 정책이 단편적이고 모순적이며 일관된 정책을 펼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기업거버넌스 개혁을 강도 높게 추진하고 있는 일본이 2018년 7위에서 작년말 2위로 상승할 동안 우리나라는 9위에서 8위로 한 계단 올라서며 여전히 하위권에 머무르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서는 중장기적인 기업 거버넌스 개혁 로드맵이 필요하다며,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까지 확대하는 상법 개정을 통해 주주를 보호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주주권리 강화를 위한 입법 부진 = 경제개혁연구소가 공개한 아시아기업지배구조협회(ACGA)의 보고서 ‘CG Watch 2023’ 한국편 ‘디스카운트의 해체(Dismantling the discount)’에 따르면 한국은 57.1점을 받아 12개 국 중 8위를 차지했다. 직전 평가인 2020년 9위에서 한 계단 상승했으나 여전히 동남아시아 수준이다. 지난 2007년 6위에서 2010년 9위로 떨어진 후 줄곧 8~9위를 유지하며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한국보다 점수가 낮은 국가는 태국(53.9%), 중국(43.7%), 필리핀(37.6%), 인도네시아(35.7%) 등 4개국뿐이다.
부문별로 보면 한국은 정부·공공지배구조(4위→6위)와 규제기관(6위→7위) 부문에서 직전 조사와 비교해 순위가 떨어졌다. 투자자(3위), 외부감사·감독(8위), 시민사회·언론(10위) 부문 순위는 유지했고, 지배구조제도(10위→9위), 상장사(10위→9위) 부문 순위는 소폭 올랐다. 유일하게 투자자(3위) 분야에서만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는데, 절대 점수는 56%로 호주(69%), 일본(65%)에 비해 훨씬 낮다.
CG Watch는 “의무공개매수제도, 영문공시 의무화 등에서 진전이 있어 이번에 한 계단 상승했지만, 기업거버넌스 개혁을 위한 로드맵이 부재하고 주주권리 강화를 위한 입법이 더디다”고 지적했다.
◆재벌에 우호적인 친기업 정책…국민연금 일관성 없는 개입 문제 = CG Watch는 윤석열 정부의 기업거버넌스 정책이 파편적이고 모순적이라는 평가도 내놨다. 개인투자자들의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한 일부 거버넌스 개선(의무공개매수제도 도입, 기업분할 시 소수주주 보호방안, 전자주주총회 도입, 자사주 남용방지 대책 등)을 추진하는 한편, 재벌에 우호적인 친기업 정책(재벌총수 사면, ESG공시 연기 등)도 동시에 펴고 있다는 지적이다.
경제개혁연구소는 “윤 대통령의 모순은 부패와 횡령으로 유죄를 받은 기업인들을 사면하여 회사에서 리더 역할을 재개하도록 허용한 데서 분명히 드러난다”며 “또한 재벌기업들의 이해를 고려한 결과 ESG공시가 계속 지연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KT, 포스코 등 민영화된 공기업에 대한 정부의 개입도 기업거버넌스 개혁의 또 다른 장애물이다. 경제개혁연구소는 “최근 포스코와 KT의 CEO 선임과정에 국민연금이 개입해 후보교체와 경영공백 사태를 낳은 것은 외국인 투자자들이 특히 우려하는 부분”이라며 “어떤 때는 침묵하고 어떤 때는 행동하며 산발적으로 개입하는 국민연금의 일관성 없는 접근은 투자자들의 혼란을 가중시킨다”고 지적했다.
◆다년간의 거버넌스 개혁 로드맵 필요 = CG Watch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일관된 방식으로 전략을 수립하는 다년간의 거버넌스 개혁 로드맵과 주주권리를 강화하는 것”이라며 “단편적인 정책과 밸류업 프로그램의 뒤죽박죽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밸류업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분위기다. CG Watch는 “재벌들이 가치상승을 원했다면 자발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어느 투자자의 말을 인용하며 “밸류업 프로그램에 포이즌필이나 복수의결권 주식 등을 포함시키기 위해 재벌들이 로비를 벌여 기존 지배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 가치평가를 약화시킬 것에 대한 우려도 전했다.
CG Watch는 주요 거버넌스 개선 과제로 △자사주 규제 강화(자사주의 조속한 소각, 지배주주의 지배력을 방어하기 위한 자사주 보유 금지, 자사주 활용 계획 공개 등), △스튜어드십 코드 개정(협력적 관여활동, 기업과 효과적으로 소통하는 방법, 이해상충의 관리 및 공개 등), △주주총회제도 개선(주주총회소집 공고기간 연장, 정기주주총회 분산개최를 위한 실효성 있는 방안, 전 상장회사에 주주총회 표결 및 표결결과 공시의무 부과) 등을 권고했다.
아울러 2년 후 2025년 평가에서 △밸류업 프로그램이 추진력을 잃거나 후퇴하는 경우, △주주행동주의에 탄력이 붙지 않거나 개인투자자를 비롯한 소수주주들의 기업거버넌스 개혁 요구가 감소하는 경우, △밸류업 정책에 포이즌필 또는 복수의결권 도입이 포함되는 경우, △의무공개매수제도가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거나 미뤄지는 경우, △ESG공시 일정이 지연되는 경우, △민영화 기업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지속되는 경우 한국의 점수가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일본, 정부차원의 강한 개혁 추진 = 한편 일본은 2018년 7위에서 2020년 5위로 올라간 뒤 2023년엔 2위로 올라섰다. 일본은 특히, 금융당국과 GPIF(일본의 국민연금)가 주도하는 기관투자자의 수탁자책임과 관여활동 활성화, 주주행동주의의 증가 등으로 투자자 분야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일본의 순위 상승은 정부 차원에서 기업거버넌스와 자본시장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결과로 분석된다. 일본 금융청은 지난해 기업거버넌스 개혁을 위한 야심찬 계획을 발표하고 자본비용, 이사회와 이사의 효율성, 관여활동 장애물 등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도쿄증권거래소의 밸류업프로그램, 경제산업성의 M&A 제도 개선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또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일본은 2023년 말 현재 331개 기관이 스튜어드십 코드에 서명했다. 이를 기반으로 GPIF(일본의 국민연금)는 기관투자자의 관여활동 촉매자로서 역할을 한다. GPIF는 위탁운용사의 의결권행사 뿐만 아니라 ESG 관여활동을 적극적으로 독려하고 관리하며, 투자자와 기업 간 대화를 촉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주주 관여활동에 대해 우호적인 여건이 조성되면서 글로벌 투자자들의 주주행동주의도 증가하고 있다. 의결권 자문회사인 글래스루이스가 2023년 검토한 정기주주총회 주주제안은 95개 사의 387건인데, 이는 전년대비 28% 증가한 것이다. 일본의 기후NGO, 아문디, HSBC, APG 등 글로벌 투자자들이 주주제안에 참여했다.
한편 아시아에 투자하는 기관들의 모임인 ACGA는 정부·공공지배구조, 규제기관, 지배구조제도, 상장사, 감사·감독, 투자자, 시민사회·언론 등 7개 부문으로 나눠 아시아 주요 국가의 기업지배구조 제도 및 관행을 평가하고 보고서‘CG Watch’를 발간한다.
김영숙 기자 kys@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