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훈 칼럼
법고창신 원리와 과학의 세계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머리와 가슴까지라는 말이 있다. 지식과 실천 사이의 괴리를 메우는 일이야말로 평생을 걸고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공자가 설파한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옛 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스승 역할을 할 수 있다)가 지식에 중점을 둔 말이라면 박지원이 주장한 ‘법고창신’(法古創新)은 실천에 방점을 둔 말이다.
최근 어느 떡집 앞을 지나다 법고창신(젊은 전통)이라 새겨진 팻말을 보았다. 어느 떡집이나 엇비슷한 맛과 모양이려니 했던 인절미며 강정이 젊은 한과명인들 손에서 새로운 모양과 맛으로 재탄생해 있었다. 서양식 고급빵을 만드는 기법을 활용한 떡, 서양식 견과로만 알았던 피스타치오를 넣어 버무린 강정도 있었다.
올해 초 미국 산타바바라 시내를 걷다 발견한 터키식 젤리 가게가 떠올랐다. 영어로 터키시 딜라이트(Turkish delight)라고 알려진 젤리는 흰 설탕가루로 젤리를 버무린 모양새가 전형이다. 터키의 인절미라고 부르면 적합할 터키 전통 디저트를 산타바바라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탄생시켰다. 피스타치오를 비롯한 각종 견과류, 말린 과일, 심지어 오레오 과자 조각까지 넣어 만든 터키 젤리의 법고창신이었다.
과학과 공학은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혁신적 파괴’를 강조한다. 이론 물리학자에서 과학 글쓰기 작가로 변신한 프리먼 다이슨은 과학을 ‘반역’이라고 정의했다. 얼핏 듣기엔 법고창신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지피지기를 전쟁 승리의 비결로 꼽은 손자의 명언처럼 파괴에도 반역에도 우선 상대가 있어야 하고 나와 그에 대해 알아야한다.
인공지능 확산모델도 법고창신 과정
20세기 초반 양자역학의 등장과 함께 완성된 원자모델이 있다. 한가운데 양성자 중성자로 구성된 원자핵이 있고 그 주변을 전자가 구름모양으로 분포한 구조다. 이 모델 전부터 물리학자들은 원자의 모습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 중 19세기 영국의 물리학자 톰슨이 만든 매듭원자이론이 있다. 실을 묶어 매듭을 만들면 실 모양은 변하더라도 매듭지어졌다는 사실 그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고무줄처럼 단순한 매듭을 만들 수도 있고, 훨씬 더 복잡한 모양으로 만들 수도 있다. 매듭을 몇번 꼬았는가를 세는 꼬임수에 따라 그 종류를 분류할 수 있다. 원자는 다 이런 매듭 구조를 가지고 있고 그 꼬임수에 따라 수소 붕소 탄소 질소 등 서로 다른 원자로 발현된다는 게 톰슨의 이론이었다.
톰슨 이론은 그 이후 등장한 원자모델에 밀려 역사의 골방으로 물러났다. 한세기 뒤 톰슨의 이론은 부활한다. 1962년 스컴이란 영국의 물리학자는 핵을 구성하는 양성자 중성자를 그 당시 유행하던 양자장론이란 수학적 도구를 이용해 설명하려다가 톰슨의 매듭과 비슷한 구조를 떠올렸다. 아쉽게도 스컴 이론 역시 곧이어 등장한 쿼크이론에 밀려 소립자 물리학의 세계에서 퇴출되는 듯했다. 이십 년 뒤 위튼이란 탁월한 수학자 겸 물리학자가 스컴 이론에 위상수학이란 옷을 입혀 부활시키기 전까진 말이다.
한세기 반에 걸쳐 톰슨, 스컴, 위튼으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톰슨의 이론은 채 콩고물조차 입히지 않은 찹쌀 인절미, 스컴의 이론은 콩고물과 설탕을 적당히 섞은 옷을 입은 인절미, 위튼의 이론은 법고창신의 정신으로 재탄생한 21세기판 인절미같다. 법고창신의 원리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 듯 싶다.
오늘날 과학과 공학의 첨단을 달리는 인공지능(AI)의 한 분야로 확산모델이란 게 있다. 필자는 이론물리학자이지만 이 분야에 흥미를 느껴 지난 반년 간 공부를 하면서 이 분야 역시 법고창신의 발전과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잉크 방울을 물에 떨어뜨렸을 때 서서히 물컵 전체로 퍼지는 게 확산현상이다. 확산현상은 강물이나 공기 등의 유체현상과 유사하면서도 일반 유체에는 없는 ‘무작위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무작위성을 다루기 위해 통계학 기법을 유체역학에 접목시켜야 한다.
20세기 초반 물리학의 거장 아인슈타인, 플랑크, 랑주뱅 등이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양자역학의 창시자 슈레딩거도 한몫을 했다. 그가 던진 질문은 ‘확산하는 유체의 운동을 시간을 거꾸로 돌려도 설명할 수 있을까’였다. 잉크가 물 속에서 퍼지는 궤도를 잘 관찰하고 기록하면 거꾸로 그 잉크 방울이 태초에 떨어진 지점을 알아낼 수 있을까라는 문제다. 슈레딩거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제시한 이론은 차츰 공학과 수학에서 최적 제어란 분야로 자리잡았고 최근에는 확산모델이란 이름으로 AI 분야의 이론적 모태가 되었다.
물에 떨어뜨린 첫 잉크방울이 고양이 사진이라면 나중에 확산이론을 통해 재구성한 잉크방울의 위치는 생성된 고양이 사진이다. 재구성된 잉크방울 위치는 확률적으로만 예측할 수 있다. 따라서 생성된 고양이 사진은 본래 사진과 확률적으로만 비슷하다. 우리가 보는 생성형AI 사진이 실물과 유사하면서도 약간 다른 이유다. 생성형AI의 방법론을 모색하던 인공지능 학자들은 슈레딩거의 한세기 전 이론을 법고창신했다. 우연은 아니다. 확산모델을 최초로 제안한 스탠포드대학 연구진을 대표하는 인도 출신 강굴리 교수는 본래 탁월한 이론물리학자였고 한세기 전 만들어진 확산이론의 정수를 이해하고 있었다.
난제 해결책은 선례에서 답 찾는 것
법고창신은 인문학자 한과명인 물리학자 AI공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몽테 크리스토백작에게 토굴감옥 안에서 셔츠를 찢어서 종이를 만들고, 생선뼈를 녹여 굳혀서 펜을 만들고, 난로 그을음에 포도주를 섞어 잉크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준 파리아 신부처럼 난제를 마주했을 때 해결책을 모색하는 인간의 본능은 결국 참고할 만한 선례를 기초로 답을 찾는 것이다. 옛 지혜와 지식으로부터 단서를 찾는 행동은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간이 생존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