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플레 부른 지정학, 이젠 인플레 요소로
글로벌 투자업계, 지정학 대응법 적극 모색 … FT “정치 맥락 무시하다 큰코다쳐”
지난 20년 동안 새로운 매매전략을 고안하기 위해 수학자들을 불러모았던 글로벌 투자업계가 이제는 지정학 전문가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정치적 상황이 막대한 변동성을 일으키면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올 2월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린 ‘FII 프라이어티 컨퍼런스’는 올해 가장 주목받는 비즈니스 행사 중 하나였다. 델테크놀로지스의 회장 마이클 델, 블랙스톤 회장 스티븐 슈워츠먼, 사우디아라비아 9250억달러 규모 공공투자펀드(PIF) 대표 야시르 알 루마얀 등 저명한 인사들이 참석했다. 이 행사 첫날 연사로 나선 미국 전 국무장관 마이크 폼페이오는 “지정학적 위험과 자본 배분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고 투자자들에게 경고했다.
일주일 뒤 마이애미에서 열린 JP모간 주최 하이일드채권딜러를 위한 행사에서는 트럼프정부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낸 라인스 프리버스가 기조연설자로 나서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해 역설했다.
지난 5월 비벌리힐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규모 자산운용사 및 고객 모임인 ‘밀켄연구소 컨퍼런스’에는 미 국무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미육군사관학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전직 소장과 여러 전현직 세계 지도자들이 연사로 나서 현 시기 지정학을 논했다.
FT는 “글로벌 투자자들이 정치에 대한 이야기에 목말라 하고 있다”며 “중동분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남중국해 긴장고조뿐 아니라 최근 바이든-트럼프 토론에서부터 프랑스의 극적인 총선, 멕시코와 인도 등 각국 선거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지정학적 이벤트를 보면 그 이유를 어렵잖게 알 수 있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투자업계 일시적인 정치적 변동성뿐 아니라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 구조적 변화를 겪고 있다고 보고 있다. 약 3530억달러의 자산을 운용하는 영미계 투자그룹 ‘야누스 헨더슨’ 최고경영자 알리 디바즈는 “지난 20~30년 동안 지정학은 디플레이션을 유발하고 위험을 낮추며 투자를 용이하게 만들었다”며 “하지만 앞으로는 완전히 정반대로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더 많은 위험을 발생시키며 투자를 더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은 지난해 글로벌 성장과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트렌드 목록에 신기술, 글로벌 인구구조 변화, 기후변화와 함께 지정학적 분열을 올렸다. 시장조성기업 ‘옵티버’가 올해 발표한 금융시장 ‘톱테일 리스크’ 목록의 절반 이상은 미국대선 결과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격화 등 정치 리스크였다.
지정학 전문가 속속 영입하는 투자업계
일부 투자사들은 지정학적 전문가를 영입하면서 이에 대응하고 있다. 글로벌 자산관리사 ‘얼라이언스 번스타인’ 최고경영자 세스 번스타인은 “지정학 전문인력에 대한 수요가 많다”며 “월가 모든 회사들이 전문인력을 영입해 투자자들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다. 심오한 재편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이 나를 겁나게 한다”고 말했다.
로스차일드앤코의 파트너이자 투자자문 공동책임자인 앨리스 스콰이어스는 “전세계에 초점을 맞춘 자산관리자들이 전례 없이 많은 잠재적 문제를 파악해야 하는 상황에서 고객에게 맞춤형 관점을 제공할 수 있는 전문가가 인기”라며 동의했다. 그는 “우리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물론 중국과 대만 코소보의 긴장,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남미지역, 가자지구 분쟁과 여러차례의 긴장된 선거 등에 직면했다”고 말했다.
금융자문사 ‘라자드’의 지정학 자문책임자인 시어도어 번젤은 “중국투자 방법에 대한 고객요구가 증가하면서 2022년 정치전담부서를 설립했다”며 “이후 팀이 빠르게 확장돼 자체 자산관리부서뿐 아니라 재무자문고객에게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에는 기업 의사결정에서 정치를 배제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이제는 서로 연결된 거대권력 간의 긴장으로 배제가 불가능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골드만삭스도 지난해 지정학 자문부서를 설립했다. 인수합병 자문으로 잘 알려진 PR기업 ‘브런즈윅’은 세계은행 전 총재, WTO 전 사무총장, 미국 국가안보국 전 국장 등 지정학 전문성을 갖춘 고문들을 잇달아 영입했다.
부티크 투자은행인 ‘센터뷰’는 최근 미국외교협회 전 회장 리처드 하스를 선임고문으로 들였다. 영국 내각부장관을 지낸 마크 세드윌 경은 로스차일드의 리스크위원회 위원으로, 자산운용사 슈로더는 전 주중 영국대사 세바스찬 우드 경과 전 영국 국방장관 니콜라스 카터 경을 영입해 지정학 및 국제분쟁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있다.
슈로더 최고경영자인 피터 해리슨은 이러한 전문가를 영입하는 이유는 투자팀에 필수적이고 상호보완적인 기술을 제공하기 위해서라며 “정치가 더욱 분열됨에 따라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투자외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우리가 배운 한가지는 지정학을 명확하게 보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이라며 “더 많은 불확실성에 직면한 지금, 카터 전 장관은 포트폴리오 매니저들에게 불확실성을 관리하는 방법, 전쟁을 관리하는 방법, 전쟁이 전개되는 방식에 대해 도움을 준다”고 덧붙였다.
주요 증시는 태평한 모습
S&P500 지수를 비롯한 대부분의 벤치마크 주가지수가 여전히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업계가 투자결정에 지정학을 더 많이 반영하고 있다는 징후가 수면 아래서 감지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사례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에 대한 투자자들의 대응방식이다. 금융정보제공기업 ‘모닝스타’에 따르면 투자자들은 2022년 2~4월 항공우주·방위산업에 초점을 맞춘 펀드에 약 30억달러를 쏟아부었다. 러시아 침공 직전 13개월 연속 순유출이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 이후에도 강한 자금유입이 지속되고 있다.
동유럽투자 전문 헤지펀드인 ‘파이어버드’는 러시아 침공 당시 자산의 절반 이상을 러시아에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중 상당수가 동결돼 큰 타격을 입었다. 이 회사의 공동설립자이자 러시아투자 책임자 하비 사위킨은 “정치를 대수롭잖게 여겨서는 큰코 다친다는 것을 일깨워준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FT는 “러시아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서구투자자는 거의 없었지만 이 경험을 통해 중국과 대만 분쟁시 더 큰 충격이 닥칠 수 있다는 점을 많은 투자자들이 고려하게 됐다”고 전했다.
모닝스타에 따르면 중국을 제외한 신흥시장에 투자하는 펀드의 수는 2022년 초 8개에서 현재 20개로 급증했다. 미중긴장이 고조되면서 이런 펀드로의 자금유입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2022년 월 평균 2억달러에서 지난해 월 평균 약 5억달러로 늘더니 올해에는 월 평균 10억달러에 육박하는 자금이 중국 제외 신흥국펀드에 유입됐다.
보다 과감하게 정치펀드에 투자하는 곳도 있다. 480억달러의 자산을 운용하는 프랑스 상장그룹 ‘티케하우 캐피털’은 지정학적 긴장 고조와 세계화의 과도한 영향에 대응한다며 올해 ‘유럽주권펀드’를 출시했다. 독일 도이체방크의 자산운용 자회사 DWS도 최근 지정학적 리스크의 정량적 척도를 기반으로 주식을 선별하는 ‘미국핵심기술’ 펀드를 출시했다.
티케하우 캐피털 부대표 토마스 프리드버거는 “우리는 탈세계화가 금융가치 창출 방식의 전환을 촉발하고 있다고 확신한다”며 “효율성이 아니라 회복탄력성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시장정보검색 플랫폼 ‘알파센스’에 따르면 S&P500 소속기업의 실적발표 및 컨퍼런스에서 ‘지정학’ 및 관련용어에 대한 논의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급증하고 있다. 알파센스에 따르면 미국 벤치마크 지수에 포함된 기업의 거의 절반이 지난 12개월 동안 애널리스트와의 통화 또는 행사에서 정치나 지정학에 대해 논의했다.
하지만 지정학적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금융시장은 우려할 만한 징후를 거의 보이지 않는다. 브렌트유 가격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날보다 더 저렴한 상황이다. 선진국 주가지수는 사상최고치로 치솟았다. 이 랠리의 가장 큰 승자는 2023년 매출의 거의 절반을 중국과 대만에서 창출한 미국 칩설계업체 엔비디아다. 미국채 투자자들도 미국정부의 부채수준이 급증할 것이라는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고 있다.
헤지펀드 파이어버드의 사위킨은 “지금처럼 많은 시장에, 치열한 갈등이 벌어지던 시기는 기억나지 않는다”며 “전문가들조차도 매우 안일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상황을 맞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