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보건 선진국으로 가는 길

2024-07-26 13:00:24 게재

중대재해법, ‘산안법 우물’에 갇힌 산업안전 건져내야(1)

2014년 국내 한 대형 항공사에서 사고예방을 위한 근원적 개선 요소를 찾기 위해 새로운 기법으로 사고들을 분석했다. 항공산업의 특성을 고려해 ‘사건과 원인요소 분석’(E&CF Chart, Events and Causal Factors chart)기법이 채택됐다.

기업 내 E&CF Chart 분석이 가능한 전문가가 여러 명 있음에도, 기법에 담긴 철학과 원리를 충분히 살리기 위해 최고 전문가를 초빙해 1개월 이상의 합동 조사분석을 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미해군 항공사고의 인적 요인 분석을 위한 ‘인적요인 분석 분류체계’(HFACS, Human Factors Analysis Classification System)의 개발자인 스콧 샤펠(Scott Shappell) 박사와 더그 위그먼(Doug Wiegmann) 박사가 초빙됐다.

사고분석은 현장의 사고예방 활동과 규정에서부터 조직 전체에 걸쳐 규범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이뤄졌다. 그 결과 타 항공사의 3배에 달하는 훈련 등 다양한 개선으로 이후의 사고발생 감소 성과가 확인되고 있다. 분석내용에는 사고에 기여한 경영요소까지 포함됐다. 이를 바탕으로 개선대책을 경영진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경영 책임자는 “사고의 원인이 다 내 탓이네”라고 농담하며 많은 자원이 수반되는 개선안을 승인했다.

산업안전보건법의 벽 터주기

항공산업의 안전수준은 일반 산업보다 현저히 높다. 그럼에도 더 진화된 사고분석을 시도하는 이유는 전체 시스템 차원의 안전역량을 향상시켜 그들의 사고발생 확률을 낮춰가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중대재해 감축을 위한 경영차원의 조치다.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은 사업의 규모나 특성과는 무관하게 전체 산업현장에서 공통적으로 준수해야 하는 기본적인 안전조치를 정한 법이다.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중대재해법)은 기업의 산업안전이 진화하도록 산안법규의 한계를 벗어나게 해야 한다.

기업의 생산 규모와 특성에 적합한 사고예방 체계와 이행을 유인해야 한다. 대기업은 더 낮은 확률의 사고예방을 위한 진화를, 중소기업은 형식에 소모되는 자원을 실질적 사고예방에 돌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산안법규 준수를 위한 중대재해법은 제정될 필요가 없었다.

최근 중대재해 사건에 대한 판결들이 나오고 있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 판결들이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죄형법정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형사재판에서 유죄라고 하려면 사고의 원인에 해당하는 법규 위반이 있어야 한다. 그 위반의 연결들도 인과관계에 있어야 할 것이다.

인과관계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유죄로 판결하려면 사고와 위반에 상관관계는 있어야 할 것 아니겠는가. 사고와 무관한 법규 위반을 유죄라고 할 순 없다.

상관관계라도 있다고 말하려면 적어도 ‘피셔의 검증’(Fisher’s exact test)에서 유의미한 관계로 인정할 만한 합리적인 근거는 있어야 한다. 피셔의 검증은 약품의 효능부터 사회과학까지 두루 쓰이는 상관관계 검증이다.

피셔 검증에 유의 수준(원인과 결과가 무관하다는 주장을 기각할 수 있는 통계적 확률)은 통상적으로 0.05를 적용한다. 원인과 결과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경우가 20건 중에 적어도 1건 이상은 돼야 유의미한 상관관계로 인정되고 그 미만은 원인과 결과가 무관하다는 의미다.

중대재해법 판결이 말이 되려면

중대재해법 첫 판결은 사고로부터 경영자의 법적 의무 위반을 ‘안전조치-작업계획-안전 관련 평가-평가절차 마련’이라는 여러 단계의 인과관계를 적시했다. 적시한 위반 조항들을 법규들로 연결했으나 그 관계가 무관하다는 주장을 기각할 수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수사과정에서 찾기 쉽지 않았을 터이거나 찾아보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다른 조항들을 인용한 후속 판결들도 최초 판결의 맥락을 벗어나지 못했고 앞으로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객관적 근거 확보가 어렵다면 사회적 공감이라도 얻어야 할 텐데, 현장을 아는 사람들은 공감하기 어려울 것 같다. 공감되지 않는 판결이 무슨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판결은 담당 판사 개인의 역할이 아닌, 법 집행 전체 시스템의 작동 결과다. 합리적인 법규, 사고예방에 관한 판사의 학습기회인 공소와 변론, 수사관과 변호인의 이해 수준 같은 관계요소들의 상호작용에 판결이 달려 있다.

관계요소들의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말이 안되는 판결들은 계속 될 것이다. 그리고 문제가 문제되지 않으면 그 문제의 해결 가능성은 없다.

고재철

법무법인 화우 고문

전 안전보건공단

안전보건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