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훈 칼럼
수학을 둘러싼 ‘공정과 불평등의 덫’
지난 학기 필자는 물리학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에게 수리물리학을 가르쳤다. 물리연구를 문학 창작 활동에 비유한다면 수리물리학 공부는 작가가 되기 위해 고급 어휘와 비유법 은유법, 동서고금의 위대한 문장을 하나씩 섭렵하고 체득하는 과정이라고 하겠다.
물리학은 이 세상을 크기와 방향이 있는 수학적 존재들인 벡터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한다.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졌는데 양자역학에서는 원자를 하나의 벡터로 본다. 뉴턴방정식 F=ma는 힘과 가속도라는 두 벡터 사이의 관계식이다.
벡터가 자연을 표현하는 단어라면 행렬은 번역기다. 한국어와 영어가 전혀 다르지만 번역기를 통해 의사소통이 가능하듯 과학자들은 숫자를 직사각형 모양으로 배열한 행렬이란 번역기를 통해 서로 다른 존재가 바라본 한 대상의 동일성을 증명한다. 시간이 흐르면 대상도 관찰자도 모두 변한다. 미분방정식은 흐르는 물처럼 연속적인 변화를 표현하는 수학적 언어다.
수리물리학은 단지 물리학에만 필요한 도구가 아니다. 벡터 행렬 미분방정식에 기초 통계학까지 더하면 요즘 유행하는 생성형 인공지능을 이해하는 언어의 기본이 갖춰진다. 수학은 자연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이기도 하다.
수리물리학이 품고 있는 경이로움을 학생들에게 보여주겠다는 설렘은 학기를 마칠 무렵 ‘공정 속 불평등의 덫’에 대한 고뇌로 바뀌었다. 30년 전에는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 노래’ 풍경이 낯설지 않은 달동네 일반고 교실에서도 이과반 학생들은 미적분, 벡터와 행렬, 통계이론을 배웠다. 하지만 공정한 교육, 사교육 및 학습부담 경감 등의 이유로 요즘 일반고 수학 교육과정에는 벡터와 행렬이 빠졌다. 일반고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수리물리학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처음 접하는 수학적 언어 앞에 당황한다.
교육과정이 인위적으로 만든 장벽들
모든 학생들이 공평하게 벡터와 행렬을 모른 채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아니다. 영재학교와 과학고를 졸업한 학생들 상당수는 이미 고교 입시준비 과정에서 벡터와 행렬을 선행학습한다. 벡터와 행렬은 수학의 자음과 모음 같은, 잘만 배우면 소화할 수 있는 결코 어렵지 않은 개념인데 교육과정이 인위적으로 세운 장벽 때문에 그만 영재와 비영재를 갈라 놓는 기준선이 되어 버렸다.
영재학교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고등학교 학생의 생기부를 보자. 수학적 유리천장에 갇히지 않은 이 학생은 벡터 미적분학, 선형 대수학, 미분방정식을 정규 수업으로 배운다. 원한다면 대학교 2학년 학생들이 배우는 해석역학도 정규 과목으로 들을 수 있다. 일반고 학생에게는 스무살이 될 때까지 금단의 열매였던 아름다운 수학 언어가 영재고 학생에겐 열다섯살 때부터 학원과 학교에서 마치 집밥인 양 제공된다.
일반고 교육과정의 수학적 유리천장이 씨줄이 되고, 고가의 학원비와 특목고 학비를 감당할 경제력의 차이가 날줄이 되어 타고난 능력 차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수학지식과 감수성의 불평등 장막이 만들어진다.
우물을 벗어난 적 없는 개구리가 바다를 보면 기겁하듯 수학적 감수성을 개발하지 못한 채 대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은 작은 물웅덩이에 불과한 벡터와 행렬 앞에서도 무릎이 후들후들해진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치고 싶어도 학생들에겐 취업준비를 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교수에겐 수업 진도에 대한 의무감이 의욕을 꺾는다. 죽만 먹던 위장이 딱딱한 음식을 소화시키지 못하듯 일반고에서 고급 수학과 물리의 개념을 다뤄보지 못한 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 배우는 물리학과 수학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채 암기식으로 공부 흉내만 내고 졸업한다
옛날 과거제도가 신분상승의 사다리였다면 지금의 과외수업은 신분고착의 도구가 됐다. 과외비를 감당할 수 있느냐 여부는 특목고 입학을 위한 충분조건까지는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다. 고등학교 진학단계에서 한번 벌어진 수학적 감수성의 간극을 대학에서 좁히기는 어렵다. 아무리 공정한 교육을 외친들 생성형 인공지능이 유행인 사회에서 벡터 행렬 미분방정식이란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 모두에게 취업과 성장의 문이 공평하게 열리기를 바랄 수는 없다.
공정교육이라며 특목고를 없애는 것은 잘못
이 세상에 없는 세가지가 ‘공짜, 비밀, 정답’이라고 한다. 수학이야말로 공짜가 없는 층상적 지식이다. 밑바닥에는 덧셈 뺄셈 등 사칙연산, 그 위층은 미적분학, 그 위에는 벡터와 미적분학의 개념을 결합한 벡터미적분학 미분방정식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층과 층 사이는 견고한 지적 사다리로 연결되어 있고, 한칸 한칸 올라갈 수 있을 뿐 건너뛰기란 없다.
21세기 신분상승의 사다리는 사서삼경이 아니라 수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정한 교육제도를 완성하겠다며 특목고조차 없애야 할까? 그건 답이 아니다. 이미 대한민국 과학교육은 소수정예를 키워 국가대표를 만드는 엘리트 체육을 닮아버렸다. 더 날카로운 공정의 칼날로 그나마 남은 몇개 선수촌마저 없애버리면 올림픽에서 메달은 누가 따오겠는가? 일반고 학생들의 잠재력을 믿고 유리천장을 과감하게 걷어내어 생존수영을 가르쳐서 수학의 바다로 나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을 고민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