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 조기 확정·갈등관리기본법 제정해야
갈등 첨예화, 선의에 기댈 수 없어
기부채납 제도, 근본적 개선 필요
◆대화 통해 문제해결 가능 = 기피시설 갈등 해결 모범 사례로 꼽히는 국립정신건강센터 문제가 결정적으로 해결된 계기는 ‘반대’와 ‘강행’을 넘어 공공과 주민이 실제 필요로 하는 것을 꺼내놓고 대화를 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당시 조정에 관여했던 관계자는 “단순한 반대 말고 정말 원하는 시설이 있느냐고 주민들에게 물었더니 주차공간과 공원시설이 크게 부족하다는 속얘기를 들었다”며 “주민 요구를 수용해 지하 1층을 거주자우선주차구역으로 만들고 지상을 공원화해 주민들이 이용하도록 중재안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재건축 단지 내 공공시설 기피 현상은 또다른 문제를 안고 있다. 서울시나 자치구 등 공공이 제3자가 아닌 이해당사자가 되기 때문에 조정 제안자 입장이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공공갈등 분야 전문가인 장현주 한국외대 행정학과 교수는 “조정 제도를 적극 활용하되 기부채납 과정에 대한 근본적 개선도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용적률을 상향하고 각종 인세티브를 제공하는 인허가 초기에 시설을 명확하게 규정해야 하는데 처음엔 두루뭉술하게 용도만 정하고 입주가 임박해서 구체적 시설을 정하다보니 자꾸 갈등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서울시도 이 같은 지적에 공감하고 있다. 아예 조합 정관에 기부채납 시설의 용도에 대해 공공 권한을 명시한다던가 입주자 모집 공고에 해당 시설은 주민이 용도를 정할 수 없는 곳이라고 정하는 등 장치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또한 한계가 있다. 자치구 관계자는 “갈수록 높아지는 주민들 눈높이와 목소리를 감안할 때 이 정도 장치로는 반대를 막기 역부족”이라고 말했다.
◆정부·지자체, 공공갈등 사실상 방치 = 주먹구구식 도시계획도 공공시설 갈등을 부추긴다는 지적이다. 김광구 경희대 행정학과 교수는 “쓰레기 소각장 수요를 예상하고 도시계획 입안 당시부터 설계했던 하남 스타필드 옆 소각장은 수영장 등 다양한 부대시설 때문에 지금은 주민들이 자랑하는 시설이 됐다”며 “주민 이기주의를 탓하기 전에 도시계획을 사전에 수립하고 확정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갈등 상황에 대처하는 공공과 시민의 접근법도 개선돼야 한다고 말한다. 공공갈등 분야 한 관계자는 “마포구 상암동 소각장 문제도 무조건 증축이 필요하다고 밀어붙일 것이 아니라 전체 서울시 차원에서 쓰레기 감축 운동을 동시에 전개했으면 명분과 설득력 확보 차원에서 다른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장에선 이 같은 방법으로도 분출하는 공공시설 갈등을 잠재우기엔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탁월한 갈등중재자나 시민 의식, 나아가 갈등당사자의 선의에 기대는 방식으로는 날로 첨예화, 고도화되는 사회갈등에 대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제도적 개선책을 마련해 갈등 상황 전반에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장 교수는 “공공시설뿐 아니라 각종 사회갈등이 확산되고 있지만 우리나라엔 공공갈등 관련 법률이 전무하다”며 “갈등관리기본법을 만들어 모든 공공기관들과 공공갈등 현장이 기본법 절차에 따라 조정과 중재를 따르도록 의무화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법 제정이 능사는 아니지만 제도적 틀을 만들고 협상을 의무화하면 대화의 장이 열리게 된다”면서 “지금처럼 그때그때 대처하는 방식으로는 봉합은커녕 갈등을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제형 기자 brother@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