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문제는 '지속 가능성'이다
22대 국회가 출범한 지 두 달이 넘도록 정쟁에 매몰돼 온 정치권에 변화 조짐이 일고 있다. 여야 양당은 최근 ‘국민의 삶과 직결된 민생정책 논의’의 시급성에 인식을 같이 하고 상설협의체를 구성하기로 했다. 정부까지 참여할 협의체의 세부 구성방안과 운영방식을 놓고 이견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논의 자체만으로도 큰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권이 기력을 잃어가고 있는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정책 개발경쟁에 본격 나선 것도 주목할 만한 변화다. 정부와 여당인 국민의힘이 지난달 기업 투자와 민간 소비를 진작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세법 개정안을 발표했고, 제1야당 더불어민주당은 지역소비 활성화를 겨냥한 ‘민생회복지원금 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켰다.
‘협치’ 이루려면 공유할 수 있는 가치 확실히 끌어내야
하지만 두 법안 모두 원안 그대로 시행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국회 절대다수의석을 거머쥔 민주당이 반대하는 한 정부여당의 어떤 법안도 입법부의 관문을 통과할 수 없고, 민주당이 아무리 국회에서 입법을 확정지은들 재의요구권(거부권)을 갖고 있는 정부가 퇴짜를 놓으면 허사이기 때문이다. 여야가 각각 발의한 두 법안이 이런 처지다.
법인세와 배당소득세, 상속세 등의 감면을 담은 정부여당의 세법개정안에 대해 야당은 ‘부자감세’라며 제동을 걸고 있다. 반면 전 국민에게 1인당 25만~35만원의 지역화폐를 지급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민주당의 특별조치법을 놓고는 정부와 여당이 ‘묻지 마 퍼주기 법’이라며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여야가 각각 “경제를 살리기 위해 꼭 필요하다”며 관철을 위해 총력전을 벌이는 대표 법안이 상대진영으로부터 ‘경제를 말아먹을 악법’이라는 정반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행정부는 여당, 입법부는 야당’으로 국정 권력이 나뉘어 있는 상황에서 이 같은 대립은 두 법안을 모두 용두사미(龍頭蛇尾) 신세로 만들 게 뻔하다.
문제는 지금과 같은 행정·입법부 분할구도 아래에서는 어떤 정책도 제대로 빛을 보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저출생·인구감소 위기 속에서 경제 양극화와 세대간·계층간 갈등과 반목 심화 등 산적한 국정과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더 증폭되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높아지는 이유다.
정부와 여야 양당이 상설협의체를 만들어 주요 정책과제에 대한 이견을 조율해나가기로 한 것은 이런 위기감의 발로일 것이다. 정치권이 이념과 진영의 벽을 넘어 협치(協治)를 이뤄낸 선례가 없지 않다. 10년 전 경기도의 보수정당 소속 남경필 당시 지사가 부지사직(職)을 진보야당에 내주며 ‘연정(聯政)’을 실행에 옮긴 게 대표적 예다.
하지만 구체적인 정책을 놓고는 이견을 좁히지 못한 경우가 많아 미완(未完)에 그쳤다는 평가다. 당시 경기도의 ‘연정’이 반쪽짜리로 그친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지만, 여야 양당이 공유하는 가치를 확실히 이끌어내지 못한 게 근본원인으로 꼽힌다. 협상학에서 강조하는 첫걸음이 두 당사자 간에 공유하는 원칙의 확립이다. 미리 합의해둔 원칙이 분명해야 각론을 놓고 이견이 불거질 때 조율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정부와 국민의힘, 민주당이 모색하고 있는 ‘협치’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기초 작업을 제대로 해야 한다. ‘국정원칙’ 합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국가건, 지방자치단체건, 공공기관이나 기업이건 관리와 운영의 기본전제가 ‘지속가능성’이 돼야 함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요즘 대한민국이 처한 저출생·인구감소와 저성장시대 진입, 이로 인해 불가피해진 중·장기 재정압박 등을 염두에 둔다면 ‘지속가능성’을 전제로 한 국정운영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심각한 재정문제 해법 끌어내는 게 최우선 숙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달 내놓은 ‘2024년 한국 경제 보고서’에서 저출생 고령화와 재정건전성 우려 등을 한국이 당면한 근본위기로 지적하며 “적절한 구조개혁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소멸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다”고 한 경고를 특히 새길 필요가 있다. 한국의 65세 이상 인구가 지난달 10일 기준 1000만명을 돌파하며 전체 인구의 19.5%를 넘어선 것은 이 지적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일깨운다.
이런 터에 올해 상반기 나라살림(관리재정수지) 적자가 연간 전망치를 13%나 넘어선 103조원에 달했다는 발표까지 뒤따랐다. 그렇다고 마냥 재정을 억누르는 게 능사는 물론 아니다. 필요할 때는 빚을 내서라도 경제를 활성화시킬 마중물을 부어야 하고, 그렇게 늘린 국부(國富)를 통해 재정을 확충하는 방법도 있다. 어떤 게 그런 정책인지를 가려내는 게 관건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최우선적으로 풀어야 할 숙제다.
이학영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