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기 “EU 경쟁력 실존적 위기”

2024-09-10 13:00:01 게재

‘경쟁력 보고서’ 발표

무역 방어책 등 제안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9일(현지시간) 유럽연합(EU)의 글로벌 경쟁력이 ‘실존적 위험’에 직면했다고 경고했다. 시급히 산업전략을 탈바꿈하지 않으면 존재마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의미다. 드라기 전 총재는 이날 벨기에 브뤼셀에서 ‘EU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그는 보고서에서 미국, 중국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연간 7500억~8000억 유로(1114조~1188조원)의 신규 투자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EU 국내총생산(GDP)의 4.4~4.7%에 달하는 규모다. 그는 이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유럽 재건 원조 계획인 ‘마셜플랜’에 비유했다. 마셜플랜 규모가 GDP의 1~2% 수준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배가 넘는 비율의 공격적 투자가 필요하다고 제언한 것이다.

그는 또 “민간부문 투자만으로는 부족하다”면서 “회원국간 공동 투자 프로젝트를 활성화하고 자본시장 통합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공동 안전자산을 발행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를 위해 유로존 국가들이 연대 보증을 통해 공동명의로 발행하는 채권인 유로본드의 적극 발행이 필요하다는 취지다.

약 330쪽 분량의 보고서는 현실진단에 기초해 혁신 격차 해소, 탄소중립 및 경쟁력 계획, 안보 및 의존도 감소, 재정 투자 강화, 거버넌스 강화 등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우선 혁신 격차 해소를 위해 혁신생태계 강화, 규제환경 개선, 인재 양성 등을 제안했다.

탄소중립에 대해서는 “유럽의 에너지 가격은 여전히 높으며, 이는 기업의 투자 의욕을 저해하고 있다”고 진단한 뒤 “유럽은 탄소중립을 통해 청정에너지로 전환해 에너지 가격을 낮추고 청정기술 분야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확보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협력과 조정, 산업정책과 보조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청정에너지 전환, 산업의 탈탄소화, 교통부문의 탈탄소화 등을 주요하게 언급했다.

안보 위기와 원자재 및 기술 의존의 문제도 지적했다. 이를 줄이기 위해 핵심자원의 공급망 다변화, 디지털 기술의 자립성 확보, 방위산업의 통합과 표준화 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거버넌스 강화를 위해 유럽 경쟁력 조정 프레임워크를 제안한 뒤 이를 통해 우선순위 분야에서의 EU 전반적인 정책 조정을 촉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드라기 전 총재는 보호무역주의를 피해야 한다면서도 “개방무역 시대가 저물고 있다”며 대응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한국 철강기업 등이 영향을 받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에 대해 역외 기업들이 CBAM을 ‘우회’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행이) 효과적이지 않다고 판단될 경우 (역내) 에너지집약 산업에 대한 탄소배출권거래(ETS) 무상 할당의 단계적 폐지를 보류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미국의 중국산 관세 인상, 중국의 외국인 직접 투자 규정 강화 등을 언급하면서 “EU에서는 외국인 직접 투자 심사가 각 회원국 권한이어서 집단적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 뒤 글로벌 수요가 급증한 반도체와 관련해서는 새로운 ‘EU 반도체 전략’ 수립도 주문했다. 그 일환으로 ‘EU 반도체 인증제도’ 신설 등을 제시했다.

드라기 전 총재는 EU의 경쟁력 쇠락을 막으려면 전반적 개혁이 ‘급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면서 복잡한 EU의 의사결정 구조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보고서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지난해 9월 연례 정책연설에서 경쟁력 강화 방안을 연구해달라고 공식 의뢰한 데 따른 것으로 제안 중 일부는 오는 11월 이후 출범하는 ‘폰데어라이엔 2기’ 정책 수립 시 어느 정도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보고서에도 지적했듯이 상당수 정책은 27개국 만장일치 합의가 필요한 데다 공동채권 등 일부 사안의 경우 EU 내에서 여러 차례 논의됐으나 회원국간 입장차가 워낙 커 실현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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