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기업인을 국정(國政)에 활용하라

2024-09-23 13:00:01 게재

미국 대통령에 재당선되면 ‘정부효율위원회’를 신설해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에게 맡기겠다는 도널드 트럼프의 최근 선언이 화제다. ‘기행(奇行)을 일삼는 두 괴짜의 조합’이라는 시각이 없지 않지만, 미국 연방정부의 비대화와 재정낭비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트럼프의 공약 중에는 수입관세 대폭 인상 등 나쁜 것도 많지만 기업인을 시켜 정부 재정을 대수술하겠다는 것만큼은 정곡을 찔렀다”고 평가했다.

WSJ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 코로나19 비상기간 동안 실업자 보호와 급여보조 명목으로 수백억 달러(수십조 원)가 부정 지출되는 등 곳곳에서 국민 혈세가 펑펑 샌 것으로 확인됐다. 공공부문의 이런 탈선(脫線)은 더 이상 관료집단이나 학계 등의 이론가들에게 치료를 맡길 수 없을 정도로 구조화·만성화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트럼프가 남아프리카 이민자 출신 ‘고졸 흙수저’로 기득권 아성에 도전해 자동차와 우주항공 분야 세계 초일류기업을 일궈낸 머스크의 야성(野性)과 기획·추진 능력을 주목하게 된 배경이다. 머스크는 정부기관인 미 항공우주국(NASA)이 독점했던 우주발사체 시장에 민간 기업 최초로 진출, 한번 발사하면 끝이었던 우주로켓의 재활용을 성공시켜 천문학적 비용을 절감한 혁신가로도 유명하다.

기업인 지혜 빌린 클린턴 대통령과 슈뢰더 총리

미국이 세계 최강의 경제력과 첨단기술력을 갖춘 부동의 강대국으로 위상을 굳힌 원동력으로 ‘기업가 정신’을 꼽는 전문가들이 많다. 보수·진보 어느쪽이 집권하더라도 기업인들이 ‘야성적 충동’을 마음껏 발현할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하고 운영해 온 덕분이라는 분석이다. 진보정치인이었지만 기업가들의 목소리에 귀를 열고 수시로 자문해 미국을 오늘날 ‘세계 유일의 정보기술(IT) 최강대국’으로 일궈낸 토대를 닦은 인물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꼽힌다.

1990년대 초반 8%로까지 치솟았던 실업률 해결을 최우선 공약으로 제시하며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를 선거구호로 내걸었던 클린턴은 당선되자마자 기업인들을 적극적으로 만났다. 요즘말로 ‘먹사니즘(먹고사는 문제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정치)’이었던 그의 공약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진영과 이념을 떠나 지속가능한 경제발전을 이끌려면 정치인·관료·학자집단의 ‘탁상지(卓上知)’가 아니라 경제 최전선에서 생존을 건 전쟁을 매일 벌이는 기업인들의 ‘현장지(現場知)’가 필요함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GE의 잭 웰치, IBM의 루이스 거스너 등 당대 최고의 기업가들을 주말에 매사추세츠주 대통령 별장으로 불러 밤새 허심탄회하게 속말을 나누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 뉴욕타임스가 이들 기업인을 ‘FOB(Friends of Bill’s: 빌 클린턴의 친구들)’라는 신조어로 부를 정도로 대통령과의 관계가 돈독했다. 이들은 클린턴에게 “곧 IT의 새 혁명이 펼쳐질 텐데 이를 선도하려면 정보망 구축을 서둘러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게 ‘정보 초고속화도로(Information Super-highway)’ 프로젝트였고, 덕분에 아마존 구글 넷플릭스 등 거대 IT기업들이 줄지어 탄생할 수 있었다.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도 기업인의 지혜를 빌려 국가 백년대계를 성공시킨 또 다른 지도자다. 진보정당인 사회민주당 소속 정치인이었지만 독일을 ‘유럽의 병자(病者)’ 신세에서 회생시킬 경제개혁 책임자로 자동차회사 폭스바겐 회장을 맡고 있던 페터 하르츠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성화됐던 노사갈등을 해결하면서 독일 경제를 되살린 ‘하르츠 개혁’은 이후 세계 각국에서 벤치마킹이 줄을 잇는 모범사례가 됐다.

대통령 인사, ‘먹사니즘’ 내세우는 야당에서도 기업인 출신 안보여

요즘 한국의 정부 및 여야 정치지도자들은 정반대의 모습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노동개혁을 연금·의료·교육과 함께 최우선 추진할 ‘4대 개혁과제’로 선정하고서도 그 과제를 이끌 책임자로 노동계 반대가 극심한 우파 정치인 임명을 강행했다. 슈뢰더 전 독일 총리의 용인술(用人術)과 비교하며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보수진영 내에서도 적지 않다.

국회의 절대 다수의석을 거머쥐고는 ‘민생 최우선 먹사니즘’을 새 슬로건으로 내건 거대야당에서도 기업인 출신은 찾아보기 어렵다. 국내 최대 증권회사 사장과 은행장 출신 등 그나마 직전 국회에서 활약했던 야당 정치인들이 이번 국회에선 모두 물러났다. 조선을 치욕적 자멸의 길로 이끈 사농공상(士農工商)의 흑역사에서 언제쯤 벗어날 것인가.

이학영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