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대망론 시들…3강 체제 재편
이시바, 당원·국민 여론조사 안정적 선두권 … 다카이치, 강경 보수층 지지 업고 약진
일본 자민당, 27일 총재선거
이달 27일 투·개표가 진행되는 자민당 총재선거는 모두 9명이 입후보했다. 일본 주요 언론은 선거가 종반으로 접어든 상황에서 선두권 3명 가운데 2명이 결선투표에 나갈 것이라는 데 일치된 전망을 내놓고 있다.
고이즈미, '해고 완화' 내세웠다 역풍맞나
일본 언론사 보도를 종합하면 고이즈미 후보는 1차 투표에서 60명 전후의 국회의원표를 확보해 가장 앞서고 있지만 높은 지지율은 기세가 꺾이는 양상이다. 공식 선거 개시 전인 이달 초까지 고이즈미 대세론이 나왔던 배경은 지지율에서 크게 앞섰기 때문이었다. 지난달 말 니혼게이자이신문 조사에서 자민당 지지층 32%가 고이즈미를 선호해 다른 후보에 크게 앞섰다.
하지만 선거전이 시작되고 토론회가 열리면서 지지율이 빠지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이달 13~15일 조사에서 고이즈미는 20%로 이시바(26%)에 밀렸다. 자민당 지지층에서는 21%로 다카이치(22%)에도 밀려 3위로 떨어졌다. 요미우리신문 조사에서도 이시바(26%) 다카이치(25%) 고이즈미(16%) 순으로 집계됐다.
고이즈미 후보의 지지세 하락은 설익은 정책과 경험부족에 따른 불안감이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특히 선거 초반 내세웠던 ‘해고 완화’를 타 후보가 ‘해고 자유화’로 공격했고,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이러한 논리가 먹히면서 종신고용 관행이 남아있는 일본식 고용풍토에서 여론의 반발을 샀다는 지적이다. 실제 아사히신문 최근 조사에 따르면 해고규제 완화에 대해 찬성한다는 응답은 37%로 반대(48%)에 크게 못 미쳤다. 더구나 자민당 지지층이 많은 60세 이상은 찬성(26%)이 반대(58%)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했다.
고이즈미는 당초 “임금인상과 인력부족, 정규직과 비정규직 격차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서는 해고규제 완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14일 토론회에서 “해고규제 완화가 아니라 (근로자) 재학습과 재취업 지원을 통해 인재가 성장산업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라고 후퇴했다. 고이즈미는 또 남녀가 결혼하면 하나의 성씨를 쓰도록 하는 ‘부부동성제’를 바꿔 당사자가 원하는 대로 별도의 성씨를 쓸 수 있도록 하자는 ‘선택적 부부별성제’를 강하게 제기한 점도 고령층의 반발을 샀다는 해석이다.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 대표선거 양상도 영향을 줬다는 평가다. 23일 투개표가 이뤄지는 입헌민주당 새 대표로 노다 요시히코 전 총리가 유력하게 거론된다. 노다 요시히코와 고이즈미 총리 구도가 되면 '경험'에서 두 사람이 대비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자민당 당원과 지지층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여자 아베’ 다카이치, 아베노믹스 계승
일본 언론에서 ‘여자 아베’로 부를 정도로 자민당 내 강경 보수파를 상징하는 다카이치 후보가 빠르게 3강 대열에 합류했다. 일본 언론은 다카이치가 1차 투표에서 45명 전후의 국회의원표를 확보한 것으로 추산한다. 고이즈미 후보에 비해 20명 가량 부족한 의원표를 당원표에서 만회해야 결선투표에 진출할 수 있다. 최근 여론조사 흐름에서 이시바 후보에 이어 2위권으로 나오는 빈도가 잦아지면서 이러한 기대도 높아졌다. 다카이치는 지난주 니혼게이자이신문(22%)과 요미우리신문(25%) 조사에서 이시바 후보에 이어 2위에 올랐다.
특히 니혼TV가 22일 투표권을 가진 당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다카이치는 28%로 이시바(31%)에 이어 2위를 기록했고, 고이즈미(14%)를 크게 앞섰다. 다수의 일본 정치평론가들은 “이시바 후보가 안정적인 지지를 받기 때문에 결선투표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다”며 “지금과 같이 다카이치 후보 상승세가 계속되면 고이즈미 후보가 탈락할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
다카이치가 빠르게 지지세를 확대하는 배경에는 아베 전 총리 노선을 계승하겠다는 분명한 입장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다카이치는 아베노믹스 ‘3개 화살’로 꼽히는 △완화적 통화·금융정책 △적극적 재정정책 △공격적인 성장전략을 사실상 그대로 유지하는 정책을 내놨다. 대표적으로 일본은행이 최근 기준금리를 인상하는 흐름에 대해서도 분명한 반대를 표시했다. 그는 “기업이 설비투자를 하기 어렵고 소비심리를 저하시킬 수 있다”며 “일본은행이 금리를 추가로 올리면 안된다”고 말했다.
재정도 확실히 풀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총재 후보에 출마하기 위한 20명의 추천인 가운데 재정확장파 지지 의원이 많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분석했다. 이 신문은 “다카이치 후보의 경제정책을 돕는 인사는 아베파 인맥이 많다”며 “적극적인 재정지출을 통한 경제성장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고 했다.
증세도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일본정부는 2023년부터 2027년까지 5년간 총 43조엔(약 400조원) 규모의 방위비를 확보해 방위력을 확장하겠다는 구상이다. 이에 따라 방위력 강화를 위한 증세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다카이치는 12일 방송토론에서 “경기를 죽이면 어떠한 것도 이뤄질 수 없다. 경제성장 측면을 고려할 때 증세 타이밍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시바, 10년 비주류 동정여론?
이시바 후보는 선두권 3명의 후보 가운데 나이(67)와 당선 횟수(12선) 등 모든 면에서 연장자다. 당(간사장, 정조회장)과 내각(방위청장관과 농림수산상) 경험에서 다른 후보를 압도한다. 당 총재 선거에도 지금까지 5회나 출마했다. 하지만 오랜 정치경험 만큼이나 당내 정적이 많다는 평가다. 대표적으로 다수파인 아베파와 천적관계다. 기시다 총리가 이끌었던 기시다파와 아소 부총재가 이끄는 아소파 등과도 원만한 관계는 아니라는 해석이다.
이시바는 2012년 총재선거 1차투표에서 당원표에서 앞서 1위로 결선에 올랐지만 국회의원표에서 몰표를 얻은 아베에 패했다. 이후 10여년 동안 당내 비주류로 일관한 점이 이번 선거에서 비교적 탄탄한 지지세를 확보한 원인으로도 꼽힌다. 최근 자민당 위기가 장기집권한 아베파를 중심으로 한 비자금 조성 사건, 옛 통일교와 부적절한 관계가 발단이 됐기 때문이다. 당의 핵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이시바가 상대적으로 부각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시바는 최근 여론조사에서 줄곧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산케이신문이 14~15일 조사한 결과 이시바는 25.6%로 고이즈미(21.9%)를 따돌렸고, 요미우리신문(26%)과 아사히신문(32%)에서도 1위를 기록했다. 니혼TV가 실시한 당원 조사에서도 31%로 다카이치(28%)를 앞섰다. 일반 국민과 당원 조사에서 다른 후보를 앞서기 때문에 1차투표에서 얻을 것으로 추산되는 국회의원표(40표)가 두 후보에 밀리지만 결선투표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언론은 점치고 있다.
이시바 후보는 정책적으로 다카이치의 대척점에 있다. 그는 일본은행 기준금리 인상을 찬성하고 각종 증세에 대해서도 적극적이다. 이시바는 21일 열린 토론회에서도 “법인세를 인상할 여지가 있다”고 말해 다른 후보와 분명한 차이를 드러냈다. 금융투자소득세 인상 필요성도 강조하고 있다. 이시바 후보는 이달 2일 TV토론방송에서 “금융소득세를 올리면 부자가 정말 해외로 나가는지 검토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시바 후보는 또 균형재정수지를 위한 재정건전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한편 한일관계와 관련해서는 누가 되더라도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쌓아놓은 우호적 분위기를 쉽게 깨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다만 다카이치 후보가 당선될 경우 진통도 예상된다. 현재 유력한 세 후보 가운데 이시바만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소극적이다. 고이즈미는 “이후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판단하겠다”고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 다카이치는 19일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앞으로도 참배를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자민당 총재선거는 중·참의원 국회의원 368명과 전국적으로 105만명 가량의 당원 직접투표를 의원수와 동일한 표로 계산해 합산한 후 과반수를 얻는 후보가 당선된다. 1차투표에서 과반을 획득한 후보가 없으면 상위 2명을 대상으로 결선투표를 실시한다. 1차와 결선투표는 오는 27일 실시한다.
결선투표는 국회의원표 368표가 그대로 유지되지만 당원표는 광역지자체별 1표씩 47표로 줄어 의원들 표심이 절대적이다. 다만 이르면 올해 안에 있을 수 있는 중의원 총선거와 내년 7월 예정된 참의원 선거에서 당선돼야 하는 의원들이 국민과 당원 여론을 무시하고 파벌간 이해관계에 따른 투표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