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계좌 개설 “은행 업무방해 아냐”

2024-09-25 13:00:24 게재

대법,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

“은행의 불충분한 심사 때문”

타인에게 넘기려고 유령법인을 만들어 계좌를 개설했더라도 업무방해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은행의 불충분한 심사로 유령법인의 계좌가 개설됐다면 위계에 따른 업무방해죄가 구성되지 않는다는 취지다.

지난해 대법원이 유사한 사안에서 업무방해죄가 원칙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법리를 선언한 후 나온 판결이다.

대법원 1부(주심 신숙희 대법관)는 업무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상고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환송했다고 25일 밝혔다.

A씨는 법인 계좌를 개설한 후 계좌에 연결된 체크카드 등을 타인에게 넘기고 대가를 지급받기 위해 유령법인을 설립했다. A씨는 2022년 5월 말 광주 서구의 한 새마을금고 지점에서 계좌개설 업무 담당 직원에게 계좌를 정상적인 법인 금융거래 목적으로 사용할 것처럼 속여 계좌를 개설하고 통장, 체크카드·일회용 비밀번호 생성기(OTP) 카드 등을 발급 받았다.

검찰은 A씨를 계좌개설로 인한 업무방해, 접근매체(계좌) 대여로 인한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계좌인출로 인한 횡령으로 기소했다.

1심 재판부는 올해 2월 A씨에게 징역 1년을 선고했다. 업무방해 등 모든 혐의가 인정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A씨의 상고로 진행된 상고심에선 A씨의 위계가 업무방해죄를 구성했는지가 쟁점이 됐다.

대법원은 업무방해 부분에 대해 직권으로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법인 명의 계좌가 개설된 것은 금융기관 담당자의 불충분한 심사 때문으로 볼 여지가 많아 A씨의 위계가 업무방해의 위험성을 발생시켰다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이다.

대법원은 “금융기관의 업무담당자가 피고인에게 금융거래 목적 등의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추가적인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거나 이를 확인했다는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A씨가 법인 명의 계좌를 개설하면서 작성한 계좌개설신청서나, 제출된 관련 서류들은 법인 계좌개설 시 기본적인 서류일 뿐이며, 계좌 명의자인 회사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거나 운영될 것이라는 등의 진실한 금융거래 목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아니다”라며 “이 부분과 관련해 심사업무를 담당하는 금융기관의 업무담당자는 금융거래 목적의 진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추가로 객관적 자료의 제출을 요구하는 등 적절한 심사절차를 진행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파기환송심 법원은 추가 증거가 제출되는 등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A씨에게 횡령과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만 유죄로 인정해 다시 형량을 정할 것으로 보인다.

김선일 기자 si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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