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보건 선진국으로 가는 길

중대재해법, 우물에 갇힌 산업안전 건져내야(3)

2024-09-27 13:00:06 게재

얼마 전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중대재해법)에 관한 토론회가 국회에서 열렸다. 토론회에서 기업 측은 법적 의무 경감과 구체화를, 노동계는 처벌 강화를 주장하고, 정부는 양측의 입장을 조율하는, 노사정 모두 중대재해 감소 보다 법적 책임에 관해 각자의 입장을 피력하는 아쉬운 토론회가 된 것 같다.

중대재해의 실질적 감소를 위해서는 이런 공방보다 실질적 방법론에 관한 토론이 학계와 전문가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산업안전 학계는 때 지난 낡은 이론에, 안전 시장은 법규에 정해진 기초 수준에, 기업은 사고예방 보다 사고발생 시 면책을 위한 업무에 갇혀 있다. 이것이 기본적이고 공통적인 의무를 정한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과 규제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현재 우리나라 산업안전계의 밑그림이다.

산업안전 중심, 규제에서 현장과 시장으로 옮겨가야

국내 산업현장에서 많은 사망사고 기인물인 사다리를 대체할 안전한 제품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기술과 자원의 문제가 아니다. 외산 제품은 많이 있다. 제품 승인제도가 문제다. 일본에서 이미 사용되던 안전난간 선시공 작업발판은 국산 시제품 제작 후 승인까지 6년이 걸렸다.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있어도 제품 개발은 엄두도 내기 어렵다.

조선업 등 특수한 생산환경의 작업장에서 작업에 적합하고 안전한 기자재를 자체 개발까지 했음에도 사용승인에 애를 먹고 있다. 이로 인해 작업여건에 맞지 않는 기자재를 사용하는 경우들도 상당하다고 한다. 정부가 관련 제품 승인방식을 검정에서 인증으로 전환했다고 하나 명칭뿐이다. 제조자 또는 사용자의 설계가 아닌, 법규에 정해진 형식과 기준 즉, 검정방식으로 승인된다. 법규가 더 안전한 사용자 중심의 안전용품 발전을 가로 막고 있다.

전체 사망재해의 50% 이상이 추락재해다. 이에 대한 조치로 추락방호망이 안전대 보다 안전하다는 사실적 근거는 없다. 하지만 시설이 보호구에 우선한다는 논리 때문에 안전대보다 우선하는 조치로 돼 있다. 그러나 공중에 설치되는 추락방호망 설치작업은 매우 위험한 작업이어서 설치작업 중 사망재해도 종종 발생하고 망에 떨어진 사람이 사망하기도 한다. 따라서 현장의 구체적 안전조치는 작업 여건과 실질적 위험의 정도에 따라 판단해 조치할 수 있도록 법규와 규제를 합리화해야 한다.

안전분야 법규와 규제의 효과 비중은 사회가 발전할수록 축소된다. 특히 1990년대 이후는 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이는 안전 선진국에서 안전학자들에게 이미 관측된 보편적 사회현상이다. 이 현상은 과학저널 엘스비어(Elsevier)에 영국 러프버러 대학의 패트릭 워터슨(Patrick Waterson) 교수와 2명의 공동 연구자가 2019년 논문으로 밝힌 내용이고 세계적인 안전분야 석학들의 공통된 견해다.

산안법규·규제, 강화 아닌 합리화 필요

지난 10여년에 걸쳐 담당 부처의 산업안전 조직은 국에서 본부로, 감독관 수는 2배, 예산은 4배 이상 증가했다. 이에 더해 산안법은 2019년 전면 개정으로 의무와 처벌이 대폭 강화됐다. 2022년 중대재해법까지 시행됨에도 불구하고 중대재해의 추세적 감소가 확인되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 역시 법규와 규제의 효과 비중이 축소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법규와 규제 합리화로 사고예방의 중심이 안전시장과 전문가의 영역으로 옮겨가야 한다.

매뉴얼 사회로 불리는 일본도 일반 근로자를 교육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다른 교육대상도 과거 경력, 다른 교육 등 작업내용에 관해 학습이 된 경우를 폭 넓게 인정한다. 법규에서 형식성은 배제하고 대화식, 15인 이내의 학급 구성 등 실효성을 보완하고 있다.

서구 선진국에서 공공재 성격이 강한 산업안전 통계와 위험 실태 등 현장상황 정보의 수집과 조사분석은 주로 공공 연구기관이 수행한다. 하지만 현장 안전조치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은 기업의 요청으로 학계와 민간 전문가들이 주도한다. 법규와 규제가 이와 같은 장의 형성과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급변하는 산업과 생산방식, 일자리 등의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면 경직된 법규와 문구에 매이는 규제로는 산업안전 후진국을 탈피하기 어렵다. 혁신 수준의 과감한 전환이 필요하다. 산업이 법규와 규제 중심으로 전개됐다면 반도체 BTS와 같은 세계 일류 상품개발과 수출기반의 경제강국은 어려웠을 것이다.

산안법은 합리화, 중대재해법으로는 사고예방을 위한 기업의 안전시스템 개선과 민간 전문가 육성을 통한 안전 수준도약이 당면 과제임을 국회와 정부에서 깊이 헤아리기 바란다.

고재철

법무법인 화우 고문

전 안전보건공단

안전보건연구원장